3편에 이어 계속...
나는 나의 노력을 쓰다듬어 준다.
한계를 인정한 다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김진애의 성장은 둘째, 목표를 정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목표란 흔히 생각하는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다. 그녀의 목표란 곧 ‘자기만의 주제’를 가지는 것이었다. 김진애의 성장은 기본적으로 스스로와 맺는 장기간의 레이스였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얻는 우월감도 아니고 경쟁을 통한 순위 쟁탈전은 더더욱 아니었다. 자신이 추구해야 할 ‘주제’를 찾고 그것에 몰두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서 무엇을 건지려면 조건은 오직 하나다. 자기 주제를 아는 것이다. 자신이 관심 가는, 자신이 흥미로워하는, 자신이 절실하게 그 무엇을 이루기를 원하는, 주제에 대한 ‘고픔’ 이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이 알고 싶은 것, 궁금해 하는 것을 명확히 하려는 노력이다.
자신이 추구해야 할 ‘주제’를 찾고 그것에 몰두하는 일. 그랬기에 지치지 않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김진애는 부패문제에 자유로울 수 없는 건축인의 숙명을 껴안고 공공의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부딪치며 배우기를 염원했고, 끊임없이 자라기를 고대했다.
오늘날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준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 둔다. 그래서 남이 하면 따라하고, 남을 이기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인생은 평생 달리기만 할 뿐이다. 지치고, 재미없고, 힘들기만 하다. 1등이어도 불안하고, 1등이 아니어도 불안하다. 전자는 언제 밀려날지 모르고 후자는 언제라도 1등을 쫓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준을 스스로에게 두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타인과의 비교대상으로서의 나’ 가 아니라 ‘어제의 나’ 와 오늘의 나‘ 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성장하고 있다면,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누구를 이기고, 누구보다 잘 나가고는 관심 밖이다. 그것은 노력해도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변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보다 나은 나, 내일이 기대되는 나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나의 ‘통제력’ 안에 있다. 그리하여 이런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의 말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김진애는 후자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안정적인 직장을 뛰쳐나와 창업을 할 수 있었고, 진흙구덩이라 일컬어지는 정치판에도 맨몸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여자였기 때문에, 잘나가는 여자였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말들도 많았다. ‘여자 맞냐’ 라는등의 공격적 표현등도 난무했다. 그러나 김진애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뚜벅뚜벅 자신의 걸음을 걸었고, 자라고 있는 자신을 보며 즐거워 했다.
남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좌불안석하는 것은 안타깝다. 나는 하찮다. 그러나 그렇게 하찮은 나이지만 나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전부이니 나에게 나는 가장 중요하다. 이 말을 수시로 나 자신에게 하면서 산다. 나의 뜻으로 나의 삶을 살고 싶다.
김진애는 전문가로서 성장하는 일 외에도, 일상생활에서도 끊임없이 성장을 추구해왔다. 그래서 일까. 그녀의 지인인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인간 김진애를 표현하는 키워드를 ‘프로젝트’ 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프로젝트. 앞으로 던진다는 뜻이다. 김진애는 삶의 아주 소소하고 사소한 일들에도 ‘프로젝트’ 라는 이름을 붙이길 즐겨한다. 그녀의 책 <인생은 의외로 멋지다>에는 4가지 큰 주제로, 삶에서 적용가능한 관계-공간-발상-세대 프로젝트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말이 프로젝트지 들여다보면 ‘에게?’ 싶은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강아지 산책 시키기 프로젝트, 야외 요리파티 프로젝트, 선물하기 프로젝트, 꽃점 봐주기 프로젝트 등등이다. 어쩌면 무척이나 하찮은 일들. 하지만 우리는 한 사람으로서의 성장과 인생의 행복은 이런 소소한 가치들에서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 못하는 짐승과 교감할 때, 왁자지껄 모여 음식을 나눌 때, 마음을 담아 선물을 고르고 준비할 때, 누군가의 인생에 간섭하며 공감할 때,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나’를 느끼고 마음 가득 뭉클함을 느낀다. 나도 모르게 한 뼘이나 커버린 스스로를 발견하고 감동하는 것이다.
김진애의 프로젝트는 소박하지만 정겹다. 작은 것에 의미 부여를 하는 그녀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미소 짓게 한다. 심각하거나 거창하지 않아서일까. 그녀는 사람들에게도 흔쾌히 ‘프로젝트’를 권한다. 그녀가 말하는 프로젝트란 스스로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그래서 보다 나은 인생을 그려나갈 수 있는 일상의 모든 실천이다.
내가 원해서 내가 만들어서 내가 하는 ‘나의 프로젝트’를 하나쯤 가지고 있다면 사는 뜻을 찾는데 가장 좋지 않을까? 물론 우리에게도 내집마련 프로젝트, 자녀교육 프로젝트 등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적인 프로젝트 외에 무언가 자신만을 위해서 그 어떤 프로젝트를 하나 가지면 어떨까. 흔들리는 자신을 버티어 줄 것이다. 자신을 덜 하찮게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자라자, 배우자, 평생토록!
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계획을 열심히 세우는 사람과 일단 하고 보는 사람. 누가 더 효율적일까. 각기 장, 단점은 있겠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후자가 오히려 더 나을 수 있다. 과학자 정재승은 이를 입증할만한 실험을 하나 들려준 적이 있다. 스파게티면으로 탑을 쌓는 ‘마시멜로 챌린지’. 각 직업군 별로 누가 더 높이 탑을 쌓나 지켜봤더니 놀랍게도 유치원생들이 오히려 CEO나 변호사보다 좋은 성적을 냈다고 한다. 이유는 하나. CEO그룹이 계획을 세우는데 골몰했다면 유치원생들은 일단 시도해보고 그 시도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으로 백번 생각 하는 것보다 한번 부딪쳐보는 것이 낫다. 실행을 통한 배우기(Learning by Doing)가 그것이다. 김진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성장은 셋째, 실행하면서 배우기였다. 그녀는 건축가로서 이론에 얽매이기보다는 실무를 늘 중요시했다. 산본 신도시, 인사동 길을 설계하며 ‘도시건축’ 분야에 뚜렷한 흔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랬기에 이런 그녀가 정치에 뛰어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누군가가 왜 정치에 뛰어들었냐는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전문가로서 일을 하다보면 역량의 유무가 아니라 정책이 문제라는 깨달음이 온다. 에너지가 고갈 된다는 느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느낌, 차라리 다 포기하고 돈이나 벌자고 불쑥불쑥 드는 생각. 이런 좌절감이 쌓이다가 ‘차라리 내가 나서 보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김진애는 늘 그랬던 것처럼 계획을 오래 세우거나 머리를 쓰며 재지 않았다. 생각을 곧 실행으로 옮겼다. 총선에 지역구 후보로 출마한 것이다. 그러나 떨어졌다. 후에 비례대표로 국회입성을 하긴 했지만 2년여의 짧은 시간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짧은 시간동안의 국회활동에서 단연 돋보였다. 모 시사잡지가 그녀를 ‘미친존재감’ 으로 표현했을 정도였으니까. 김진애는 비유하자면 ‘마시멜로 챌린지’를 하는 유치원생이었다. 노련하거나 전략적이진 않았지만, 현장에 나가길 주저하지 않았고 움직이며 배웠기에 누구보다 더 많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었다.
건축가 김진애. 그녀는 지금도 강연을 멈추지 않으며,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기 위해 애쓰고 있다. 올해 나이로 어느새 환갑. 그러나 그녀가 가장 좋아한다는 ‘김진애너지’ 라는 별명처럼 아직도 현장에 서있는 팔팔한 현역이다. 한비야는 언젠가 강연에서 ‘나는 내가 앞으로 뭐가될지 너무 긍굼하다!’ 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중년에 나이에, 앞으로 뭐가 될지 궁금하다니... 그녀의 말에 청중들은 와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웬걸. 이제는 진지하게 그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한비야나 김진애처럼 성장을 멈추지 않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내일’ 을 기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책을 쓰고, 전문가로서 커리어를 쌓고, 방송에 나와 토른을 하고, 부정에 대해 소리높여 비판하고, 이제는 SNS를 통해 활발하게 소통하고 호탕하게 웃어보이는 그녀. 김진애의 내일이 기대된다. 그녀가 무엇이 되어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일이란 자신의 능력보다 약간 어렵게 느껴질 때가 가장 흥미롭다. 익히 잘하는 일을 해야 할 때처럼 지루한 것도 없다. 역시 가장 신날 때란 약간 모자라고 그 모자라는 것을 채우고 싶고, 채우고 나면 무언가 달라질 것 같고 할 때다. 그 모자라는 것을 채우면서 어떤 일을 해낼 때,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는 듯하고 가슴이 부푸는 것을 느낀다. 죽을 때까지 약간은 모자라다고 느끼며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분명 죽을 때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사는 동시에 죽을 때까지 자랄 것이다. 삶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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