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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갑 리포트] ⑪-3 '공부는 스승과 벗을 찾아가는 네트워킹이다' 고전평론가, 고미숙

by 김핸디 2013. 2. 22.




공부. 수능을 앞 둔 어느 날, 나는 증오에 찬 눈빛으로 수학 문제집을 쳐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수능만 끝나면 내 인생에 공부란 단어를 폐기처분 하겠노라고. 그런 결심을 한 이가 비단 나뿐이었을까. 우리 고3들은 수능이 끝나자마자 문제집을 산처럼 쌓아놓고 거대한 화형식을 치뤘다. 어찌나 속이 다 시원하던지... 불길을 바라보는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음은 물론이었다. 친구들도 모두 후련한 표정이었다. 잘 가라, 수학. 잘 가라, 영어. 나는 악당을 해치운 영웅이 된 기분으로 타들어가는 문제집을 바라보고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터미네이터였다. I'll be back을 외친지도 모르고 있었건만, 어느새 돌아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토익. 그것은 한층 더 강해진 영어의 진화버전이었다. 한숨이 푹푹 나왔고,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으며, 가끔은 눈물이 나도록 억울하기도 했다. 그렇게 불태워 없애버렸건만, 다시 내 앞길을 막아서다니! 한 여름, 친구와 놀이터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왜 우리가 이토록 꽃 같은 세월을 도서관에서 영어와 씨름해야 하는지를 울부짖었다. 죽어! 죽어! 죽으라고!!! 그 날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영어라는 놈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취업을 준비하면서는 더욱 기가 막혔다. 그렇게 영어는 어찌어찌 사라지고 없었는데... 국어와 수학이란 놈이 ‘적성검사’ 라는 이름으로 떡하니 돌아온 것이다. 오. 마이. 갓. 이건 꿈일거야... 이 죽일놈의 국영수. 중학교 때나 풀던 속도 문제와 농도 문제를 몇 번이고 끄적이다가 나는 좌절했다. 이건... 10대의 쌩쌩한 두뇌를 지니고도 풀지 못했던 내 인생의 난제가 아니던가. 도대체, 왜, 이럴바엔 대학에서 뼈빠지게 토론하고 리포트를 작성했단 말인가. 이럴바엔 그냥 중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직 시험을 보게하지! 하지만 별 수 없었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문제집을 한 권 사와서 풀던 어느 날 밤. 나는 패배감에 조용히 몸을 떨어야만 했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에서 공부란 대체로 이런 느낌이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는데도 달라붙는 거머리. ‘억지로’ 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보통명사. 그러나 고미숙은 공부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인생역전’ 의 수단이라고. 아니, 인생역전은 로또의 동의어가 아니던가. 그런데 아니란다. 공부로도 정말로 ‘인생역전’ 할 수 있단다. 어떻게? 그녀가 말하는 공부의 진짜 가치를 지금부터 들여다보도록 하자.



# 고미숙의 공부


사실 고미숙. 공부 할 만큼 했다. 명문대 졸업했고, 박사학위 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진짜’ 공부는 박사학위를 딴 이후에, 즉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와의 이별을 선언하는 그 순간에, 그녀는 새롭게 공부에 눈을 뜬 것이다.


박사논문을 쓴 뒤 학문적 차원에서 나를 사로잡은 욕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의무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내적 에너지에 의해 추동되는 앎의 여정을 밟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이건 사실 지극히 평범한 욕구이다. 그런데도 용기와 담대함이 요구된다. 달리 말하면 그러한 욕망을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경직된 코드가 암암리에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곧 마흔 살을 눈앞에 둔 나이였기 때문일까. 나는 성적 차별보다 지적 열정을 나이에 따라 구획하는 그 같은 습속의 기제가 더 갑갑하게 느껴졌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내적 욕구. 논문과 학위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고미숙은 뜻밖에 내적으로부터 ‘알고 싶다’ 라는 욕구를 느꼈다. 공부의 끝에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다 라는 마음이 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개인 공부방을 연다. 호기심과 지적욕구로 무장한 공부! 사실 모든 공부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공부를 지겹다고 여기는 이유는 이 ‘내적 욕구’ 가 거세되었기 때문이니까. 무언가의 흥미를 느끼기도 전에 사회로부터 우리는 공부를 강요받는다. 국어의 아름다움과 문학의 가슴저림을 느끼기 전에 먼저 암기를 강요받고, 영어를 공부함으로 얻을 수 있는 영미문화권의 다양함을 채 알아가기도 전에 해석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공부가 재미있을 리 있겠는가. 고미숙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바로 내적욕구, 즉 스스로의 필요에서 느끼는 자발성이다.


자율성과 자발성은 사실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모든 일의 성공 여부는 이 자율성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리학에 따르면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더라도 대가를 받기 시작하면, 자율성이 훼손된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치자. 그런데 어른이 와서 그림을 그릴 때마다 잘한다며 용돈을 주고 간다. 처음에 아이는 좋아하는 일도 하고 돈도 받으니 신이 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른이 용돈을 주지 않으면, 아이는 그림그리기를 멈출 확률이 크다. 좋아서 한 일이 어느새 돈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용돈이 없으면 그림그리기도 없다. 아이가 그림그리기로 성공할 확률? 물론 거의 없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공부패턴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학교에서의 공부는 곧 성적으로 치환되고, 그것은 상급학교의 진학이나 어른들의 칭찬, 혹은 장학금등의 물질적인 보상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이런 것들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보상이 없으면 공부도 끝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도, 어쩌면 이렇게 보상만을 위해서 공부하는 이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고미숙 처럼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꾸준히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류들? 아니다. 이들의 특징은 단 하나다. 외적보상이 아니라 내적욕구에 충실하다는 것. 스스로가 좋아서 하는 공부. 아는 것 자체를 즐기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공부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고미숙은 그렇게 박사논문을 쓴 뒤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그녀가 시작한 공부는 당연히 시험을 위한 것이나 수단으로서의 공부가 아니었다. 고전. 그녀가 택한 공부는 책 읽기, 그것도 고전을 통한 삶의 재배치 였다. 그렇다면 왜 수많은 책 중에서도 굳이 고전을 선택한 것일까. 그녀는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율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고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자 매트릭스이기 때문이다. <주역>처럼 실제로 우주의 비의가 담겨 있는 것도 있고, 불경이나 성경처럼 인간의 존재론적 물음을 탐구하는 것도 있고, 돈키호테나 열하일기처럼 삶의 지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도 있다. 한 인간이 평생 경험할 수 있는 시공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전이 있기에 그 협소한 시공간을 넘어 아득한 역사의 궤적을 조망할 수도 있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비전을 탐구할 수도 있다. 전혀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체험할 수도 있고, 생명과 존재의 심연을 항해할 수도 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그런 인간의 유한함을 보완해주는 여러 매체가 있으니 책과 영화 등이다. 그 중에서도 간접경험으로서 가장 집약적으로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것은 역시 책이다. 특히 고전은 시공간을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지금 이 시간의 사회현상이나 문화가 보편적인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수 백년, 많게는 수 천년을 이어져온 고전을 통해 들여다보면 알게 된다. 작금의 사회현상이 보편적인 것인지, 지금 금기시 되는 것이 미래에도 금기될 것인지, 현재의 선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선인지, 아니면 폐기되어야 하는 악의 다른 이름인지.


여기서 잠깐. 고전을 강조하노라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볼멘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 하다. 그래서 결국 고전을 읽으라는 뻔한 소리야? 라는. 물론 여기서 고전은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 같은 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책들도 다 이유가 있으니 선정된 것이겠지만 고미숙이 말하는 고전은 ‘삶의 존재이유’ 를 찾을 수 있는 길잡이로서의 책이다. 그녀가 말하는 배움 역시 책 속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삶을 통해 체득하는 지혜, 그것이 바로 고전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좀 더 풀어서 이야기 해 보자. 고미숙은 일전에 문사철 특강을 통해서 '배움이란 삶의 적용되는 모든 것' 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경제 경영등의 현재 소위 주가가 높은 학문의 예측이 다 틀렸는데(혹은 틀릴것인데) 왜 계속 그런 실용학문을 배우려고 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공부를 하면 아는 게 많아지므로 삶이 더 자유로 져야 정상이다. 아는 게 많으니 누리는 게 많아야 정상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공부해오던 것들은 현대인을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속박하고만 있다. 왜 일까. 현대의 공부들은 세부적인 기술이나 방법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런 공부는 아는 만큼 자유로움을 선사하지 않는다. 알면 알수록 우리는 전문적이라는 이름의 협소하고 작은 인간이 되어만 간다. 그럼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가. 인간의 존재를 탐구해야 한다. 총체적인 개념을 제시하는 공부를 해야한다. 이러한 공부는 '고전읽기' 다. 결코 행복하다고만은 볼 수 없는 현재의 삶을 성찰하고 대안을 보기위해서 우리는 고전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원 안에 있는 사람이 원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처럼, 현대인의 삶을 현대의 학문으로 비추어 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고전읽기는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게끔 해주는 가치 있는 공부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가' 라던가 '어떻게 살아야하나' 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얻게 되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삶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삶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국민 드라마 반열에 올라 숱한 화제를 낳았던 <대장금>과 <제빵왕 김탁구>. 그 드라마의 주인공은 평생을 걸쳐 배움을 추구한다. 장금이는 음식과 의술을 추구하고 탁구는 제빵에 목숨을 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과 경쟁이 아니다. 다만 자기 인생의 존재이유인 의술과 제빵이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의술을 베풀고, 더 맛있는 빵을 만드는가가 이들이 공부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이 목표를 위해서 그들은 끊임없이 연구한다. 책을 보고, 실습해보고, 실수에서 배운다. 그렇게 이들이 온 몸으로 체득하는 지식과 지혜야 말로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공부의 기쁨이며 고전의 본 모습이다. 고전은 곧 지혜인 것이다.


4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