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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갑 리포트] ⑪-1 '공동체야 말로 최고의 생존전략이다' 고전평론가 고미숙

by 김핸디 2013. 2. 19.






멘탈갑 연구소는 제 11대 멘탈갑으로 고전평론가 고미숙을 선정한다.


프로필

명랑한 글쓰기와 유쾌한 강연을 지향하는 고전평론가. 연암 박지원과 임꺽정을 사랑하며, 앎이 삶을 구원한다고 믿는다. 사주명리학적으로 '조직운' 과 '공부운' 밖에 없이 태어났는데, 묘하게도 그 두 가지 운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삶은 대체로 시험과 닮았다. 몇 개의 선택지 중에 답을 고르면 되는 구조라는 것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크건 작건 선택을 한다. 대체로 부모님의 선택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성인이 되어갈수록 ‘나의 선택지’ 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어느 대학을 갈지, 어느 전공을 할지, 어떤 직장에 갈지, 누구를 만날지. 어떤 선택은 죽을 만큼 힘들고 또 괴롭지만, 서너 개 중의 하나를 골라서 간다는 점에서 그 본질은 똑같다. 그렇기에 삶은 어려워 보이지만 그리 어렵지만도 않다. 객관식이니까. 모를 때에는 에라 모르겠다 라며 찍을 수 있으니까. 물론 여러 번 찍으면 나쁜 선택을 할 가능성도 커지겠지만, 대체로 어떠한 경우에도 답을 골라낼 수는 있다.


하지만 가끔 주관식 시험지를 들고 사는 사람이 있다. 진짜 어려운 것은 이처럼 선택지가 없는 경우이다. 보기가 없는 주관식을 삶에서 만났을 때, 세상이 제시하는 어떠한 선택지도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 때 그 문제를 맞딱뜨린 사람은 진짜로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한다. 포기하든가, 아니면 만들어 내던가. 아무도 가지 않는 길에 용감히 발을 내딛어 개척하는 사람. 모두가 걸어가는 크고 넓은 길이 아니라, 벽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부딪쳐 기어코 길을 만들어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로 주관적 시험지를 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고미숙의 삶도 그랬다. 그녀의 직업은 고전평론가. 그럴 듯 해보이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이 직업을 가진 사람은 단 하나뿐이다. 왜. 그 직업을 당사자가 직접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백수였다. 명문대 박사학위까지 있었건만, 백수였다. 스스로가 민망했다. 대학 졸업할 때도 백수였는데 박사 학위를 받고나서도 백수라니... 그러나 그녀는 곧 깨달았다. 자신의 삶은 주관식 시험지라는 것을. 때문에 더디게 답을 써내려 갈 수 밖에는 없겠지만, 덕분에 남과 경쟁하지 않고도 답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시험지에 ‘공부’ 와 ‘공동체’ 라는 풀이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고미숙의 공동체



수유너머. 이 공동체는 고미숙이 수유리에 처음 터를 잡고 시작한 수유공부방에서 시작된 이름이다. 박사학위를 따고 고미숙은 뜻밖에도 개인 집필실을 마련했다. 물론 그녀가 처음부터 이런 결단을 내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 역시 박사 학위자 대부분이 그러하듯 처음에는 교수를 지망했다. 하지만 이내 그 교수임용 과정에 환멸을 느끼고 고민을 시작했다. 나는 왜 교수가 되려 하는가? 내가 교수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적 지위나 안정된 직장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가 교수가 되고 싶었던 건 일단 공부가 하고 싶어서였고, 그 지식을 나눌 수 있는 제자들을 원했던 것 뿐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꼭 교수가 되어야만 그 일을 할 수 있나. 대답은 ‘아니’ 였다. 그래서 고미숙은 연구실을 열었다. 마음껏 공부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공부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수유너머를 처음 알았을 때 느꼈던 감정은 경이로움 이었다. 밥도 같이 먹고 공부도 같이하는 지식인 공동체가 있다고? 신기하면서도 동시에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 박사가 어떻게 대학이 아니라 제도권을 벗어나 활동할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기업이나 국가의 지원 같은 것도 없이 순수하게 공부만 하는 연구실을 차릴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저렇게 지식인들이 오로지 공부하는 재미로 모이는 공간을 만들어 냈을까.


그러나 고미숙을 움직이는 힘은 의외로 아주 간단했다. 공부를 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공부를 하려면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 필요했으니까. 고미숙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 연구실을 마련하게 된 것은 무슨 실존적 결단 이전에 공간이 필요해서였다. 당시 나는 17평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공간은 좁지 책은 자꾸 늘어나지 나중에는 신발장까지 책이 꽉 차버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방법은 아파트를 늘리거나 새로운 공간을 얻거나 둘 중의 하나. 나는 후자를 택했다. 수유리 공부방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수유리 공부방으로 시작한 고미숙의 공간은, 이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게 하면서 개인집필실에서 공동체로 거듭난다.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려면 밥을 먹어야 하니까 밥을 함께 먹기 시작했고, 공부를 하는데 밥까지 해결되니 사람들은 그곳에 상주하기 시작했다. 상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수면실을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밥, 잠, 공부를 함께하는 지식인 공동체 ‘수유너머’ 가 완성되었다. 수유너머의 성장과정은 이처럼 철저한 ‘욕구’ 와 그에 뒤따르는 자연스러운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우리 삶에서 이처럼 본질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간단하고도 명료해진다. 욕구가 있으면 일단 하면 된다. 그리고 필요가 생기면 그것을 채우게 되는 힘이 절로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거꾸로 한다. 필요가 채워질 때까지 먼저 기다리고, 그 다음부터는 욕구를 가져보려한다. 물론 이래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 낼 수 없다. 욕구가 곧 필요를 채우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 대학생들은 대체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거창한 직위나 소속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것을 얻기까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욕구를 유예한다. 학생은 교사가 된 뒤에 가르쳐려 하고, 다큐멘터리는 PD가 된 다음에 찍으려 하고, 기사는 기자가 된 다음에 쓰려고 한다. 그렇기에 나의 ‘장미빛 미래’ 를 꿈꾸며 지금은 공부를 하고, 스펙을 쌓고, 시험만을 준비한다. 하지만 가르쳐보지 않고, 찍어보지 않고, 써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 일을 좋아한다고 말하며 평생 할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소속과 직위는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와 안정을 제공한다. 하지만 내가 정말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것이 꼭 학교여야 할 필요는 없다.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으면 카메라 하나만 들고 밖으로 나가면 그만이다. 기자가 되고 싶다면 내 주변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글을 이미 쓰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무엇이 된 후에 그 일을 하겠다는 건, 사실 그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이럴 때의 우리의 바람은 사실 그 일 자체를 향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일을 하는 직업이 지니는 사회적 지위와 간판을 탐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고미숙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시작했다. 처음 시작했을 때 그것은 언뜻 밑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보였다. 누구의 지원도 받지않고 보유한 전 재산을 털어 보증금을 내고 월세를 감당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남는 장사, 그것도 수지맞는 장사였다. 그녀는 이렇게 전한다.


수유리 공부방의 운영방식은 그야말로 원시적 수준이었다. 개인 집필실이었으니 당연히 내가 전체를 부담했다. 월세와 먹을거리비용을 포함하여 대략 월 60여 만 원을 쓴 것 같은데 그 정도의 돈으로 수많은 친구들과 접속하는 한편, 고병권, 이진경 같은 번개 브라더스와 밴드를 구성했고, 온갖 첨단의 지식을 주워들었으며 길거리에서 지식을 전파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능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매달 60만 원씩 붓는 적금을 들었다면 일년에 약 700만 원 정도를 벌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돈이 그만한 관계와 능력, 더 나아가 그만큼의 행복을 내게 주었을까.



월 60만 원. 비용을 어디다 투자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대부분의 성인은 일정수준의 금액을 재테크의 용도로 삼는다. 저축이나 펀드, 일부 용감한 이는 주식투자까지. 우리들은 그 돈이 나와 내 미래, 그리고 나아가서는 우리 가족을 구원해 줄 무기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고미숙은 똑같은 돈을 자신의 노후나 일신의 안위를 위해 소비하기 보다는 그 돈을 기꺼이 공동체를 위해 투자했다. 그리고 그 투자는 대 성공이었다. 덕분에 공부를 마음껏 하고, 그 공부를 같이 하는 동료들을 만나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으니까.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