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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갑 리포트] ⑩-3 "여러분은 천년 전에도 없었고 천년 후에도 없을거에요." 철학자, 강신주

by 김핸디 2013. 2. 14.









2편에 이어 계속...



난 누가 비웃어주면 밥도 사줄 수 있습니다. 드라마 카이스트에 나왔던 대사다. 소위 천재들이 모인다는 카이스트. 그 대학의 한 노교수는 비웃음을 받는다는 것을 하나의 특권으로 여긴다. 창조적인 사람만이 다른 이들의 비웃음을 살 수 있다며. 그는 라이트 형제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교수님, 그거 아세요. 비웃음을 당하는 거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비행기를 만든 라이트형제, 그 친구들이 날개를 만들어서 펄럭이고 다닐 때 사람들은 다 비웃었어요. 야, 이 사람들아. 그런 거 만들 시간 있으면 밭에 나가 비료나 줘라, 그랬어요. 난 누가 나를 비웃어주면 술도 사줄 수 있습니다. 진짜에요.”



사실, 창의성은 용기에 다름 아니다. 남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의문을 품을 줄 알아야 하니까. 남들과 다른 생각을 기꺼이 끌고 나갈 수 있어야 하니까. 비단 창의성뿐일까. 우리 시대의 미덕으로 꼽는 도전정신과 열정도 마찬가지다. 안정이 아니라 모험을 추구할 용기가 없다면 도전정신도 없기 때문에.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밀어붙일 용기가 없다면 열정도 없기 때문이다. 창의성, 도전정신, 열정. 다 다르게 말할 수 있겠지만 결국 이들이 내포하고 있는 궁극의 가치는 단 하나. 바로, 용기다.



오늘날엔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쫄지마’ 가 유행했던 건, 그 만큼 쫄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이니까. 우리는 권력에 쫄고, 자본에 쫄고, 하다못해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도 쪼그라든다. 이런 현실에서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 ‘내 생각’을 관철한다는 것은 얼핏 불온해 보인다. 그런데 내 이야기, 내 생각을 가져야만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남들의 의견만 반복한다면, 굳이 내가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남들처럼만 살아간다면, 나는 곧 지워져도 무방한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눈 송이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적이 있다. 뭐하러 이렇게 아름답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결정이 다 저마다의 모양을 뽐내고 있었다. 눈 뿐만이 아니다. 모래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모래를 확대해서 찍은 사진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 적이 있었다. 같은 모래 알갱이는 하나도 없었다. 겉에서 보면 다 똑같은 모래인데, 하나하나가, 다, 달랐다. 눈 송이나 모래가 이토록 다 다르다면 사람은 오죽할까. 물론 사람은 각각 다르다. 생김새도 다르고, 몸매도 다르고, 지문도 다르다. 유전학자에 따르면 99%의 유전자는 같지만, 1%이내의 ‘다름’ 이 개개인의 개성을 구성하는 요소라고 한다. 수십억명속의 하나이지만, 나와 너는 늘 집단이 아니라 하나의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없다. 오직 나만이 있을 뿐.




강신주도 철학자로서 뭉뚱그린 집단이 아닌 각기 다른 개개인으로서 존재에 집중한다. 그는 특히나 ‘여러분은 천년 전에도 없었고, 천년 후에도 없을 것’ 이라며 우리 개개인의 단독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핵심은 우리에 자꾸 나를 함몰시키지 마세요. 그 정신을 항상 가져야 돼요. 나는 나에요. 나는 천년 전에도 없었고 천년 뒤에도 없어요.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으로 제대로 살면 되요. 그러면 역사는 그만큼 진보해요. 뭐든지. 그런데 마치 누가 해도 할 것을 내가 하고 있다, 그 할 거는 이미 정해져 있는 거죠. 그러면 거기서 심각한 문제가 오는 거에요. 나는 나에요. 나는 엄마가 아니고, 나는 대통령도 아니에요. 나는 나에요. 나는 니체도 아니고 스피노자도 아니에요. 그거 까먹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나다. 강신주가 줄창 강조하는 단 하나의 명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다. 남이 아니다. 남과는 다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누가 해도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살아서는 안 된다. 그건 내 자신을 지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그게 우리에게 필요한 첫 번째 ‘용기’다.



남들과 다른 나만의 일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역설적이게도 남들이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강신주는 이것을 공부의 이유라고 말한다. 대학에서는 수십년전의 일들을 배우고, 대학원을 거치면서 불과 수년전의 학문들을 배운다. 그리고 그 학문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비로소 남들이 가지지 않은 ‘나만의 질문’을 가지고, ‘나만의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박사학위를 따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를 탐구 해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의 모든 발전은 결국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로부터 나왔으니까. 좋아하는 분야를 파고들어서 궁극에는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아무도 만들어내지 못한,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거창한 것일 필요는 없다. 그것이 기술이든, 예술이든, 사람이든, 다만 나를 나일 수 있게 하는,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만들 수 있게 하는 그 무언가이어야 한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을 하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공부를 하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는 것. 강신주가 추구하는 삶이란 바로 그거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최종목표는 강신주가 되는 것, 강신주적인 삶을 사는 것’ 이라고.



나를 믿고 지켜보는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방법이 있는 삶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강신주가 자주 인용하는 시인 이성복의 말이다. 그는 기존의 만들어진 ‘방법’ 에 얽매여 살지 않기를 권한다. 사랑도, 삶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기준이나 방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방법을 따라 사는 순간 그건 이미 내 삶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TV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일이>를 보면 자신만의 탐구를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무수하게 많이 나온다. 바다를 탐험하고 싶어서 스스로 잠수함을 만든 아저씨, 기가막힌 솜씨로 재활용품으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할아버지, 노래하는 것을 좋아해 자신의 차를 개조하여 노래방을 만들어 낸 아저씨까지. 이들의 공통점은 겉으로 보면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무언가에 지독하게 열중하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다름’ 을 만들어낸다는데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은 참 행복해보인다. 그들의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한다. 저 사람은 참 ‘이상하다’ 고, 혹은 ‘유별나다’ 라고. 하지만 그 이상하고 유별난 점들이 그를 행복하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들은 남들의 손가락질이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끈덕지게 이어 갈 수 있는 강단이 있다.



나비학자 석주명은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골라서 10년만 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강신주식으로 정의하자면 결국 성공이란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남들이 시킨 일을 하기 보다는 내가 스스로 하고싶은 일을 찾아서 하는 것.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일을 하는 것. 김기덕 감독이 세계 3대 영화제를 석권하며 돋보일 수 있었던 이유도, 결국 자본의 논리에 갇히지 않은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상을 타서가 아니다. 상을 탔기 때문에 그라는 존재가 '알려 졌을' 뿐. 그는 남들과 다른 이야기를 다른 형식으로 했고 이미 그것만으로 인생에서 주인으로 자리잡은, 성공한 사람이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에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지만, 나라는 인간의 성장에 기여하고 사회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을 무언가를 믿고 지켜나갈 수 있는 용기다. 드라마 <메리대구공방전>에도 이런 대사가 나온다. ‘꼭 통장잔고가 늘고 취직을 해야만 발전하는건 아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건 없지만 내 안에서 뭔가가 이만큼 기카 컸을거야.' 라고. 모두가 당장 이득이 되는 일만을 하라고 강요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모두가 하는 일을 따라하는 삶은 사실 가장 위험한 삶일 수 밖에 없다. 현재에는 안전해 보일지 모르지만,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닥쳤을 때, 그리고 시대가 원하는 것이 바뀌었을 때 우리 모두가 하는 그 ‘안전한’ 일은 결코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 이기 위해서는 통장잔고나 스펙만을 쌓아올리기 보다는, 자기만의 씨앗을 가지고 그것을 내면에서 가꾸어 나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오래 걸려 싹이 틔우고, 꽃이 피기까지는 잔인한 기다림이 있을것이지만,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조급함에 그 씨앗을 뒤 엎어서는 안 된다. 일년을, 어쩌면 평생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기다림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꽃이 피는 순간, 그게 비로소 우리가 태어난 순간부터 기다려온 ‘우리 자신’ 의 모습과 조우하는 순간일 테니까. 그것이 바로 용기있는 자에게만 주어진 '나만의 삶' 일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