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탈갑 연구소는 제 7대 멘탈갑으로 국제구호전문가 한비야를 선정한다.
프로필
공식직함 세계시민학교 교장, 정체성은 '바람의 딸'. 30대에 훌쩍 배낭을 메고 지구를 돌고 온 이후, '가슴 뛰는 삶' 을 찾아 국제구호에 헌신했다. 젊은이들에게 전 세계를 무대로 삼을것을, 지구상의 모든 문제와 모든 사람이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이야기 한다. 쓰는 책 마다 베스트셀러가 되며, 배낭여행과 국토종단, 국제구호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인생은 몇 km 로 달려야 할까.
인생은 길이다. 방향과 속도를 선택해야 하는. 그것이 정해져있는 10대 까지는 그래서 우리는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 사람이 자기만의 길을 가는 것은 방향과 속도가 각기 달라지는 20대 때부터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20대도 대부분 비슷한 방향과 비슷한 속도로 나아간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악착같이 비슷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단연 속도 쪽이다.
23살이 되었을 때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똑같은 속도를 내고 있는 줄만 알았던 친구들이 저만치 달려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난 아직 대학생인데 이제 몇몇 친구들은 직장인이었다. 처음으로 그런 불안감을 느꼈다. 혹시나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휴학을 여러 번 했던 나는 졸업이 늦었다. 하여 대학졸업장을 받고 사회인이 될 때까지, 먼저 앞서가는 친구들 앞에서 내심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
27살이 되었을 때 다시 머릿속이 하얘졌었다. 이번엔 결혼이었다.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모여서 10대처럼 깔깔거리고 웃고 있던 그 때,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 나 가을에 결혼해. 순간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며 아이처럼 투덜대던 우리들은 할 말을 잃었다. 처음으로 듣는 친구의 결혼 소식이었다. 결혼을 한다는 친구 앞에서 우리는 순간 너무도 작아져 버렸다. 저 멀리 앞서가는 친구를 보며 괜히 낙오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몇 번의 결혼식에 익숙해지니 이제는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때 또 한 번 쿵 소리가 나며 마음이 내려앉았다. 난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넌 벌써 출산이라고? 친구들이 그렇게 앞서 갈 때마다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나만 제 자리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괜시리 울적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꼭 남들과 같은 속도로 살아야 하나. 취업한다고 따라 취업해야 하고, 결혼한다고 따라 결혼해야 하나.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승환의 <삼촌 장가가요> 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결혼이라는 건 숙제가 아니야.’ 맞다. 삶이라는 것은 몇 살까지 취업, 몇 살까지 결혼, 몇 살까지 출산 등이 정해져있는 숙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인생을 숙제하듯 산다. 대학을 제 때 못가면 불안해하고, ‘결혼 적령기’에 맞추어 부랴부랴 결혼을 하고, 내 집 마련을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좀 느긋하게, 내 속도대로 살면 안 되는 걸까. 타인의 속도에 반하는 삶은 정녕이지 불가능한 것일까.
인생에 늦은 시기는 없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대학은 남들보다 6년이나 늦게 갔고, 직장도 남들보다 10년은 늦게 들어갔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 늦음을 만회해보겠다고 발버둥을 칠만도 한데, 삼십대에 훌쩍 직장을 그만두고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누구냐고? 바로 ‘바람의 딸’ 이라는 별명을 지닌 베스트셀러 작가 한비야다.
한비야는 대학 입시를 실패하고, 6년간을 대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고졸 민간인’ 으로 보냈다. 기울어진 집안 형편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계속해야 했고, 그 때문에 온전히 공부에 매달릴 수 없었다. 과외, 클래식DJ등 여러 개의 알바를 병행하면서 ‘대학에 가자’ 라고 다시 결심하기 까지. 자그만치 6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남들보다 뒤쳐져 출발한 사람이 한비야였다. 말이 쉬워 6년이지, 첫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 진학을 유예했던 6년간은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입시에 필요한 학원비와 대학 등록금이 마련될 때까지 조급해 하지 않았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6년 만에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 한 때 ‘삼수벌레’ 라는 말이 회자된 적이 있었다. 해충박멸업체 세스코 홈페이지에 어떤 사람이 ‘우리집에 삼수 째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삼수벌레가 있는데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라고 장난반식으로 문의를 해온 것이다. 그런데 그 담당자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저장해충식품중에 화랑곡나방이라는 있습니다. 이 녀석은 환경에 따라 유충기간을 2주에서 300일까지 조절이 가능하며 성충으로 우화한 이후에는 다른 녀석들과 동일한 수명을 지닙니다. 지금은 남들보다 조금 늦을 수 있지만 그 이후는 동일하거나 더 나을 수 있다는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야말로 우문현답, 현명하면서도 위로를 주는 한 마디에 네티즌들은 환호했다.
사실, 우리 주변에도 늦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친구 중 하나는 대학 3학년을 마치고 돌연 자퇴를 선언했다. 선생님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에 다시 입시를 치른다고 했을 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착잡하고 우려 됐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스스로의 선택을 밀고 나갔다. 결국 남들보다 몇 년 늦게 교육대학에 입학했지만, 지금은 선생님으로서의 직업에 만족하며 초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가끔 대견한 친구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그 때 ‘늦었다’ 는 이유로 친구를 말렸었더라면, 그리고 친구가 만에 하나 포기했더라면 지금 와서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을까, 하고. 우리의 인생이 10년만 살다 가는 것이라면 몇 년 늦는 것이 정말 뒤처지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팔십년 이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수년간은 그리 늦는 것이 아니다. ‘평생’ 에 비하면 몇 년 밖에 되지 않는 그 속도를 늦추지 못해서, 저 만치 달려간 뒤에 수 십년을 후회할 지도 모르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비야는 대학도, 취업도, 배낭여행도, 모든 걸 늦게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늦은 걸음이었을지라도 결코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그녀는 뚜벅뚜벅 걸었고, 그 걸음만으로도 홍보전문가, 오지여행가, 국제구호 팀장이라는 여러 봉우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일까. 그녀는 자신의 삶을 증거삼아 ‘인생에서 너무 늦은 시기는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29살에 너무 늦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인생을 90세로 생각하고 축구 경기에 비교해보자. 전반전 45분, 후반전 45분. 그렇다면 29세, 당신은 겨우 전반전 29분을 뛰고 있는 선수다. 그 선수가 전반전의 절반을 겨우 넘은 경기 도중에 너무 늦었다고 말하는 거다. 당신 말대로 실책하여 몇 골을 먹었다고 해도 아직 전반전도 끝나지 않았다. 후반전 45분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은가? 연장전도 있고, 패자 부활전도 있다. 만회할 시간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제발 늦었다는 생각은 하지 말기 바란다. 늦기는 뭐가 늦었다는 건가? 전반전 29분을 뛰고 있는 선수가 몇 골 들어갔다고, 이건 절대로 만회할 수 없다고, 이미 진 경기라고 짐 싸서 집에 가는 축구 경기를 보았는가? 세상에 그런 경기를 보았는가 말이다. 당신의 인생 경기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한비야의 삶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인생의 속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배낭여행을 다녀와서 40대에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고, 구호요원으로 일하다가 다시 이론의 부족함을 느끼고 50대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 20대에 배우고, 30대에 돈을 벌며, 4-50대에 삶의 기반을 잡고 안정을 찾는 ‘일반적인 삶의 속도’를 거부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40대에는 왜 배우면 안 되는가. 왜 50대에는 꿈꾸면 안 되는가. 이맘때는 으레 이래야 한다, 라는 고정관념의 잣대와 기준은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이고,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하버드대 심리학교수인 엘렌 랭어에 따르면 우리는 기대한 대로 늙는다고 한다. 나이가 들기 때문에 눈이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늙을수록 눈이 나빠질 것이다’ 라는 기대가 실제로 우리의 시력 감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반면, 그녀의 유명한 실험 ‘시계거꾸로 돌리기’ 연구에 따르면 70대 노인들을 20년 전의 생활환경에서 20년 전처럼 행동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50대와 같은 체력향상을 가져올 수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나이는 그저 나이일 뿐인데 우리가 지레 맞춰놓은 인생의 시계대로 움직이려 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삶에서 누가 먼저 앞서나가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시작은 그저 시작일 뿐이다. 소설가 박완서의 등단은 40세 였고,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을 발표한것은 60세 였다. <반지의 제왕>은 톨킨이 62세에 발표한 작품이고, 히치콕은 61세에 <사이코> 를 완성했다. 역사가 기억하는 것은 그들의 걸작이지 그들의 시작과 첫 작품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천천히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빨리 어딘가 도착하기만을 바란다.
세계적인 문학작품인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서도 주식중개인이었던 고갱이 뒤늦게 화가의 삶을 선택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고갱은 부인과 자식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화가의 삶을 선택한다. 중년의 나이에 새로운 길을 향한 그의 선택은 늦은 선택이었지만 결코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 고갱은 무수한 작품을 남겼고, 아직도 미술사는 그의 이름을 고이 간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한비야는 전 세계를 누비며 살아왔지만 여전히 하지못한 것들에 대한 기대와 하지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60대에 못다한 오지여행을 하고 70대엔 세계의 국립공원을 여행하며, 80대 이후에는 가진 것을 몽땅 나누어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녀에게는 20대와 70대가 그리 다르지 않다. 체력의 한계는 있을지언정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비야는 말한다. ‘마지막까지 성장을 멈추지 않는 바람의 할머니가 되고싶다’ 라고.
물론, 누구나 한비야처럼 살 수는 없다. 우리는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고, 세계를 몇 바퀴씩 돌면서 살 수도 없을테니까. 하지만 말이다. 적어도 그녀의 삶에서 ‘정해진 속도란 없다’ 라는 용기백배의 응원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40대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고, 50대에도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지금의 방황과 몇 년간의 뒤처짐은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은 길다. 괜히 인생이 마라톤에 비유되는것이 아니다. 부디 몇 년 늦는 거, 실패 좀 겪은 걸로 위축 되거나 자괴감에 빠져들지는 말자. 20대가 내 인생이듯, 50대도 내 인생이다. 그리고 그 때 역시 우리 모두에게는 해야 할 일과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을 것이다. 그러니 좌절금지. 조금 늦는다고 할 수 없는 거 아니고, 돌아간다고 잘 못 되는거 아니다. 한비야가 그녀의 삶으로 보여주었고,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인생에 늦은 때는 없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편적인 시간표와 자기 것을 대조하면서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곤 한다. 나는 벌써 늦은 것이 아닐까. 내 기회는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닐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의 인생에서 이 표준 시간표가 정말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오히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시간표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가을에 피는 국화는 첫 봄의 상징으로 사랑받는 개나리를 시샘하지 않는다. 역시 봄에 피는 복숭아꽃이나 벚꽃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한여름 붉은 장미가 필 때, 나는 왜 이렇게 다른 꽃보다 늦게 피나 한탄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준비하여 내공을 쌓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매미소리 그치고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 드디어 자기 차례가 돌아온 지금, 국화는 오랫동안 준비해온 그 은은한 향기와 자태를 마음껏 뽐내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늦깎이라는 말은 없다. 아무도 국화를 보고 늦깎이 꽃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처졌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의 속도와 시간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고, 내공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직 우리 차례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철에 피는 꽃을 보라! 개나리는 봄에 피고 국화는 가을에 피지 않는가.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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