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웅현의 키워드 2. 자존
스펙은 어디까지 갖춰야 스펙일까.
평점 3.75, 토익점수 852점. 대기업 신입사원의 평균적인 스펙이다. 하지만 말이 평균이지, 실제로 들여다보면 4.0 이상의 평점과 900점 이상의 토익점수도 수두룩하다. 그래도 취업은 녹록치 않다. 하여, 이 땅의 20대들은 괴롭다. 대체 이 놈의 스펙은 어디까지 갖춰야 스펙인걸까.
사실, 스펙은 한번 시작하면 끝이 안 보이는 레이스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900점 이상의 토익점수를 갖췄다 해도, 만점자가 나타나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만점을 받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만점을 받는 순간,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들. 즉, 외국 유학생이나 영어회화 능통자를 따라잡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스펙 경쟁은 ‘선착순 5명’을 닮았다. 죽어라 뛰어도 5명안에 들지 못하면 다시 뛰어야 하는. 여기에 나의 절대적 능력은 중요치 않다. 오로지 상대평가다. 남들보다 무조건 빨리 뛰어야 한다. 그저 남들을 이겨서 5명안에 들어야하는 것이 전부인 것이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미래가 불확실할수록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집착을 한다. 게다가 구직자는 많고 일자리는 소수다. 기업은 내가 얼마나 훌륭한 인성을 갖췄는지, 잠재력을 갖췄는지를 차분히 검토해 줄 시간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스펙을 쌓는다. 내가 누구인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웅현을 만나고나선 의문이 생겼다. 스펙 경쟁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정말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수단’ 인 것일까. 물론, 스펙보다 중요한 것은 스토리다, 따위의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 스토리라는 것이 사실 스펙을 이야기로 풀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박웅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는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의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대학 때 정말 신문사 기자를 하고 싶었는데, 상식책 달달 외우는 게 너무 싫었어요. 스물 일곱 지식인으로서 내 자존이 허락하질 않았던 거죠. 그래서 < 안나카레리나 > 를 집어 들고 줄기차게 읽었죠. 같이 신문사 준비하던 친구들이 뭐라고 얘기하면 '(상식책) 그게 상식이냐? (안나카레리나) 이게 상식이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결국, 그는 신문사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그가 차선책으로 선택한 광고에서 어떤 위치에까지 올랐는지를, 또 어떤 성취들을 거두었는지를. 그렇다면 박웅현을 그 자리까지 일으킨 힘은 무엇이었을까. 박웅현은 그 힘의 근원을 ‘자존’ 이라고 말한다.
스펙보다 중요한 것은 자존이다.
박웅현은 뛰어난 광고인이지만 처음부터 승승장구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중시되는 광고판에서 그는 너무나 사변적이었고 생각이 많았기 때문이다. 주위에선 요즘 뜨는 음악을 찾았고, 최신 마케팅 트렌드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의문을 품었다. 트렌드와 같은 ‘가변적인 것’ 이 중요한 것일까하는 의심을 품은 것이다. 그래서 버텼고 그 고집은 초창기의 부적응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광고의 본질은 커뮤니케이션이었고,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은 사람의 대한 이해였기 때문이다.
박웅현은 그가 버틸 수 있었던 힘을 ‘자존’ 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가 정의하는 자존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남의 눈치를 보며 따라가는 소모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켜낼 수 있는 힘’ 이다.
사실 우리가 스펙을 추구하는 것도 다 이 자존이란 놈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10대 때부터 남들이 그려놓은 이정표 대로만 살았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외부의 기준과 잣대에 민감했고 그래서 남들이 하는 것을 눈치 보며 따라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뭔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학교를 졸업했고 사회에 나왔다. 한번도 ‘진짜 중요한게 무엇인지’를 고민해보지 않은 탓에 사회에 나와서도 여전히 남의 눈치를 본다. 뒤처지지 않기에만 급급한 것이다.
그래서 남을 따라간다. 남이 하니까 나도 공부하고, 남이 하니까 나도 그 시험을 본다. 그렇지만 눈치를 보는 삶은 언제나 공허하다. 기준이 타인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박웅현은 눈치 보는 삶을 거부했다. 남들이 시험을 준비할 때 책을 읽으며 생각을 키웠고, 가변적인 것을 좆아 움직일 때 불변의 것을 쥐고 그 자리에 있었다. 고려대 졸업장은 그의 스펙이었지만, 그를 수 만명의 명문대 졸업생중에서 구별시켜줬던 것은 바로 그의 자존이었다. 그는 자기중심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너무 외롭다고, 왕따라고 '어떡하지!' '뭘 해야 잘 보일 수 있지!' 이렇게 흔들리기 시작하면 중심을 잃어버립니다. 중심을 잃으면 다 무너지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기중심을 놓치면 안 됩니다.
고수들의 생각은 통하는 것일까. 박웅현의 언급은 얼핏 알바자 리노의 스타일에 대한 정의를 떠올리게 한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이 입고 싶은 대로 마음껏 자기 스타일을 고수하라. 스타일이란 유행이 아니라 우리가 내면에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이다
매번 바뀌는 유행이 아니라 평생 변하지 않는 스타일에 관심이 있다던 패션 거장의 말이다.
한편, 박웅현의 자존은 싸이의 ‘특별함’ 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 유튜브를 통해 일약 월드스타로 발돋움한 싸이는 데뷔 때부터 줄곧 특이함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뚱뚱한’ 댄스가수였고, ‘직설적인’ 가사로 노래했으며, ‘엽기’ 가 캐릭터였다. 몇몇 사람들은 환호했지만, 몇몇 사람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돌 일변도의 가요계에서 싸이는 비주얼로나 몸매로나 한참이나 열등한 듯 보였다.
하지만 싸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특이한 것은 머지않아 특별한’ 것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의 스타일을 고수했고, 그것이 운 좋게 때를 만나서 세계인의 반응을 얻었다. 싸이는 자신을 지켰다. 싸이는 언제나 싸이였다.
박웅현은 광고회사를 다니면서도 끊임없이 <서양미술사>등을 읽으며 시대를 이어져오는 미술을 공부했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들고 다니며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았다. 그가 읽는 책은 소위 광고회사가 중요시여길 트렌드나 감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결국 그를 광고전문가의 자리로 이끌어준 것은 흔들리지 않고 지켜온 자신만의 가치였다.
박웅현은 자존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나무학자 강판권과 GIS 전문가 송규봉씨의 이야기를 전한다.
사람들은 살면서 수많은 점(點)들을 뿌리게 되는데, 이런 점들이 싹 깔렸다가 필요한 순간 점 다섯 개가 연결되면서 별이 됩니다. 이 분들이 나무학자가 되고, GIS 전문가가 되기까지 그 그림을 미리 머리에 그려놓고 달리진 않았을 겁니다. 매 순간 자기중심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별을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점 다섯 개가 모여 별이 된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그런 것들이 모여 별이 되는 것이다. 물론 남들과 다른 궤도를 그리며 사는 것은 겁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을 찍어야 한다. 남들을 따라 살기에는 남들이 이미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은 모두가 가기에 결코 내가 주목받거나, 나를 드러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박웅현은 스스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켰고, 마침내 그 생각의 점들을 모아 별을 그려냈다. 그것이 그가 반짝이는 이유이고, 우리가 그를 우러러 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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