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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탐사실/2013 내 인생을 바꾼 100가지

#8. 20대를 지탱해 준 소설, <달의 바다>

by 김핸디 2013. 7. 1.



누군가 나에게 너의 20대를 지켜 준 책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정한아의 <달의 바다>를 꼽고 싶다. 그 때는 그런 줄 알았다. 한 때는 나도 남들처럼 좋은 직업을 가져야만, 그래서 폼나게 내 이름이 어딘가에 오르내려야만 행복한 줄 알았다. 돈은 많이 못 벌어도 괜찮았는데, 그래도 이름은 알려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만 '주인공'으로 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폼나게, 남들의 선망을 받으면서, 그렇게 살고싶었다.  


언제였더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이 책을 추천해줬다. 한 때 PD가 되고싶어 언론고시라는 것을 준비하던 우리에게, 친구는 "여기 소설 속 주인공 완전 우리 얘기야" 라는 말을 전해 왔다. 책을 보니 과연 그 동질감이 깊었다. 소설 <달의 바다> 속 주인공은 기자 시험을 준비하는 '은미' 라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5년 째 기자가 되고싶어 도전하지만 번번히 '작문시험' 에서 낙방하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했던 시험 마저 떨어진 은미, 결국 그녀는 자살을 하기로 결심한다.


결심까지는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을 즈음, 그녀의 할머니가 뜻밖의 제안을 한다. 미국에 가서 고모를 만나고 오라는 것. 고모라고? 은미는 당황스럽다. 은미의 고모는 15년째 얼굴을 보지 못했고, 소식마저 듣지 못했던 인물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간 고모와 계속 연락을 취해오신듯, 놀라운 이야기들을 은미 앞에 펼쳐놓기 시작한다. '사실 너희 고모는 미국에서 우주 비행사로 일하고 있어.' 


한편, 은미에게는 20년지기 절친 민이가 있다. 그는 '서울에서 가장 잘생긴 애' 라는 소리를 어렸을 때 부터 듣고 자랐을 정도의 미모를 지닌 꽃미남이다. 뭇 여성들의 흠모를 받아오며 살아온 그이지만, 사실 민이는 여자가 되고 싶어한다. 은미와 민이는 남녀간의 친구이긴 하지만, 마치 동성친구처럼 아무런 어색함 없이 밤새 통화를 하고, 틈나는 대로 만나며 우정을 유지한다. 5년 동안 모든 실패를 묵묵히 응원해주고 바라봐 준 사람. 은미는 그런 민이와 미국으로 가 고모를 만나보기로 한다.


고모는 과연 우주비행사였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그 집에서 우주항공국 출입증과 비행시간표등을 보게 된 은미. 그녀는 민이와 함께 할머니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음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고모는 그런 둘을 데리고 일하는 곳을 구경시켜주겠다고 한다. 뜻밖의 전개에 설레고 들뜬 마음으로 그곳을 찾은 은미와 민이. 그러나 그곳에는 예상치 못한 반전히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소설은 꿈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모는 학창시절부터 우주비행사를 꿈꿔왔고, 은미는 5년째 기자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 했으며, 민이는 머리가 크고 나서부터 늘 여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중에서 꿈을 이룬것은 민이 뿐이다. 고모는 알고보니 우주비행을 테마로 한 관광센터에 일하고 있었고, 은미는 미국에서 돌아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이대갈비' 에 출근한다. 그렇다면 꿈을 이루지 못한 두 사람은 불행한걸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작가의 의견이다. 


이 소설은 꿈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꿈 꾸는 것에 다가섰다가 그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싹틀 수 있고 행복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행복은 꼭 '직업' 이나 '직장' 에 있는 것이 아니라 꿈을 향해 있는 내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그런 내 자신을 늘 변함없이 응원해주는 사람들로부터 존재한다는 것을,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하더래도 그것 또한 괜찮은 삶일 수 있음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나는 언론고시에 도전하겠다는 결심을 거둬들였다. 소설 속 은미가 '한번도 기사쓰는 것을 좋아한적이 없었다' 라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나 역시 내가 '공중파 방송 pd'라는 직업이 좋아서가 아니라 '좋아보여서' 하려고 했던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은미는, 과학수재의 길을 걸어왔고 전도유망한 연구원이었으나 현재는 무척 단조롭고 소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고모를 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스스로도 즐겁게 일하고 있는 고모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지금 있는 이 곳에서 행복을 찾기로 결심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달을 잡으려고 애쓰기보다는, 여기 이 바닷가에 발을 담그고 첨벙거리는 삶을 택한 것이다.


이 책을 읽었던 20대 초반 이후로, 아직도 나는 '내가 원하는 나' 를 만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은미처럼, 내가 번 돈으로 책을 사고, 영화를 보고,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신다. 아무것도 이룬것은 없지만 그래도 매일 빠짐없이 무언가를 바라보며 다가서고자 한다. 그리고 은미가 그랬던것처럼, 고모가 그랬던것처럼 그 자체로 매우 행복하다. 어쩌면 내가 추구하는 이상은 아주 오래오래 바라보기만 해야할 모습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자체로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닐까. 그것만으로도 괜찮다. 달을 만지지 않아도, 여기 있는 그대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 이 소설은 내게 그 삶의 지혜를가르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