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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실

좋겠다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되서

by 김핸디 2013. 3. 23.


할아버지, 소는 나중에 뭐가 돼? 


-뭐가 되긴. 이렇게 여물먹고 잘 커서 새끼 좀 낳다가 나중에 죽어서 고기가 되는거지. 허허허.  

그럼 할아버지는 뭐가 되는데? 


-이 늙은이가 뭐 그런게 있나. 그저 이렇게 살다 죽는거지. 그러고보니 내 인생이나 소인생이나 별로 다를것도 없구만. 허허. 


좋겠다.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되서. 난 커서 뭔가가 되어야만 하는데.


- 베스트극장 <지오> 中







소장입니다.


이번주 스터디 주제가 발달 심리학이어서 10대때 제 일기장을 들춰보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절절한 기록들이군요. (울컥) 고등학생 때 제가 가장 좋아했던 일 중의 하나는 단막극을 시청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인지 유독 일기장엔 인상깊었던 단막극들의 대한 이야기가 많네요. 그 중 한편은 <지오>라는 제목의 mbc베스트극장을 보고 대사를 옮겨적어 놓았더군요.


좋겠다.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되서.

난 커서 무언가가 되어야만 하는데.


10대때의 저는 이 대사를 듣고 가슴을 부여잡았던 모양입니다. "난 커서 무언가가 되야만 하는데" 아마 당시의 저는 존재로서의 나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로서의 어떤 나를 가져야한다는 압박을 느끼며 견뎌야 했었겠지요. 10대때는 때때로 현실의 나는 모조리 부정당하고, '앞으로 되어야 할 나'의 모습만 쫓음으로서 힘겨움을 느끼곤 하니까요.

세월은 흘렀어도 감성은 그대로인가 봅니다. 저 대사를 읽는데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10대 때의 저는 어찌나 이토록 연약하고 흔들리는 존재였는지... 문득, 내 안의 어린아이를 꼭 안아주고 이렇게 다독여주고 싶어집니다. '뭐가 되어야 필요는 없어, 그냥 너는 너로 존재하면 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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