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때마다 감동을 주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그 어려운 길을 걷는 소설이 있으니, 바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다. 대개 유명한 소설들은 그 첫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가령,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서로 다르게 불행하다' 라는 <안나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나 '재산깨나 있는 독신남은 아내가 꼭 필요할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적인 진리이다' 라던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이 그렇다. 하지만 <메밀꽃 필 무렵>을 생각하면 언제나 마지막 문장이 먼저 떠오른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이 문장에는 음절 마다 허생원과, 동이와, 성서방네 처녀의 삶이 들어가 있다. 장터의 분위기, 달밤의 고요함, 허생원의 복잡미묘한 심정 역시 상상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니, 어지간히 라니, 기울어졌다라니! 아무리 읽어도 읽어도, 그 느낌이 다르고 또 여운을 남기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수년 전 가을, 봉평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 때 버스를 타고 가면서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찢어 온 <메밀꽃 필 무렵>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봉평의 그 광활한 메밀꽃밭에 내려서, 친구와 나는 소설 속 한 구절을 입으로 읊조리며 웃었다.
산 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듯이 흐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숨이 막힐 듯한 풍경, 숨이 막힐 듯한 문장.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읽을 때마다 내가 한국인으로 살아왔음에, 모국어를 한글로 사용하고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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