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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갑 리포트] ⑧-3, "나는 교수지만 교수가 아니다." 심리학자 김정운

by 김핸디 2013. 1. 10.

 

 

 

김정운의 키워드 2. 아이덴티티

 


Who am I?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공식발음 즈앙봐알자앙)은 이렇게 울부짖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의 과거는 어두웠다. 배가 고파서 빵 한 조각을 훔쳤고 그로인해 죄수번호를 부여받았다. 다시 은촛대를 훔쳐 달아난 그. 세월이 흘러 이제는 사회적으로 명망을 얻고 새로운 이름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다른 남자가 그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는다. 번민하는 장발장. 그는 신 앞에 절규한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의 성공한 시장 마들렌인가, 아니면 은촛대를 훔치고 달아난 도둑 장발장인가.

 

장발장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한 번쯤 살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나의 경우에는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가 그랬다. 이미 사춘기 때 끝냈어야 할 고민을 뒤늦게 시작하면서 다이어리를 새카맣게 나는 누구지?’ 라는 질문으로 점철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남들이 다 하는대로.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대학까지는 왔는데 정작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했고 좌절했다. 그 때 내가 내린 결론은 여자, 한 집안의 장녀, 대한민국 사람, 대학생 등에 불과한 밋밋한 것들 뿐이으니까. 몇몇 관계와 그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지위로만 확인할 수 있는, 너무도 초라한 자아탐색이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자신을 주로 사회적 지위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경우가 트위터나 페이스북등의 자기소개 페이지이다. 무슨 대학교 무슨 학과 재학 중, 모모 기업 모모 부서 근무 중, 직업은 뭐, 누구의 SNS에 들어가든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자기소개는 이렇듯 소속을 중시하는 사회적 지위에 관한 것이다.

 

물론, 직업은 중요하다. 하지만 직업은 결코 그 사람 자체가 될 수 없다. 세상에 똑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직업에 종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직업만으로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같은 대학에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느 대학의 무슨 학과의 재학 중이라는 정보만으로 그 사람을 규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최근 드라마 한 편을 보면서 아이덴티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 신현준, 김정은 주연의 월화드라마 <울랄라 부부> 였다. 그 드라마에서 부부였던 신현준과 김정은은 영혼이 바뀌어 버린다. , 남편인 신현준의 영혼이 김정은의 몸에 들어가고, 반대로 아내인 김정은의 영혼이 신현준의 몸에 들어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의 역할을 그런대로 수행해가지만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친한 친구들에게 영혼이 바뀌었다는 것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그 고백의 과정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김정은의 몸을 한 신현준은 친구 최성국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야 이 자식아, 나다.’ 물론 최성국은 처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정은을 쳐다보며 말한다. ‘제수씨 미쳤어요?’ 그런데 김정은의 몸을 한 신현준이 슬슬 자신을 증명하기 시작한다. 둘만 아는 이야기. 그리고 너무도 신현준스러운 태도와 말투. 결국 최성국은 김정은의 몸을 한 신현준을, 곧 신현준 자체로 받아들인다. 외모가 완전히 달라진것도 모자라 성별까지 바뀌었는데도 그는 (김정은의 몸을 한) 신현준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로 다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무릎을 쳤다. 아이덴티티란 이런 것이구나. 겉모습이 아무리 바뀌어도, 가까운 친구라면 알아볼 수 있는 나만의 이야기, 나만의 행동, 나만의 말투와 나만의 습관들.

 

 

김정운은 대학교수다. 그러나 대학교수가 아니다.

 

 

아이덴티티에 관해서라면 김정운을 빼놓고 말할 수가 없다. 김정운은 대학교수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대학교수가 아니라고.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말인가. 대학교수가 대학교수가 아니라니.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대학교수라는 직업과 김정운이라는 사람은 동의어가 될 수 없음을. 그는 또한 심리학 박사이다. 그러나 이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심리학박사가 곧 김정운은 아니라는 것을. 김정운이 심리학박사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면 그는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당연히 여겨지는 어느 회사의 부장, 사장, 교수와 같은 내 사회적 지위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내 본질과 상관없는 것들이다. 생각해보라! 도대체 언제까지 사장할 것인가. 언제까지 교수일 것인가. 나는 어느 대학의 교수나 어느 위원회의 위원장이 아니다. 나는 슈베르트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내 노래에 감동하여 눈물 흘리고, 아내의 관심이 조금만 식어도 쓸쓸해하고, 하늘거리는 주름치마에 가슴 설레어 한다. 그게 진짜 나다.

 

대학교수는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겠지만 인정받는 직업이다. 오랫동안 공부해야하고, 박사학위가 있어야 하며,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지만 얻을 수 있는 자리니까. 10여년을 공부에 매진해서 어렵게 얻은 성과이니만큼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스스로도 자부심을 느낄만한 직업이다. 그러나 김정운은 그러한 직업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는다. 슈베르트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그 노래에 감동하며 눈물 흘리는 사람. 그게 바로 김정운이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교수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교수보다는 슈베르트의 노래에 눈물을 흘리는 교수가 더 멋있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교수이기 이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안다. 어떠한 직책을 자신의 전부인양 내세우는 사람들과는 달리, 교수라는 직책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일뿐 전부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대개, 사회적 지위와 자신을 동일시 여기니까. 그리고 그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오로지 뭐뭐하는 누구로만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니까. 교수라는 직업에 매몰되지 않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김정운이라는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분명히 찾아가고 있는 그는, 그래서 멋진 사람이다. 김정운에게 교수라는 직책은 언제든 내던질 수 있는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55세에는 다른 걸 할 거다. 교수 그만두는 게 목표다. 나는 교수라는 호칭이 날아가는 게 너무너무 무섭다. 그런데 그 호칭에 의해 내 삶이 규정되는 게 싫다.

 

김정운은, 이런 사람이다. 대학교수. 얼마나 안정적인 직업인가. 그러나 그 호칭에 의해 자기 삶이 규정되는 게 싫단다. 그래서 교수를 그만두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 역시도 호칭이 사라지는 것이 무섭지만, 두렵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받아들이려 한다. 안주하지 않으려고, 진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사회적 지위와 자신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