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 멘탈갑리포트 2편
(1편에 이어서...)
나도 김정운을 만나기 전까지 좋아하는 일, 재미있는 일로 ‘영화보기’를 손꼽으며 살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다 분명하게 규정해야 한다’ 라는 김정운의 말 앞에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영화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지가 오히려 불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가만 보자.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뭐더라. 코미디? 아, 아니다. 멜로? 아니 아니, 스릴러? 결국 나는 장르 하나 규정하지 못했다. 왜?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은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는 뭘 재밌어하지? 일단 움직이는 걸 좋아했다. 배드민턴, 서바이벌 게임, 탁구 등이 내가 정신없이 몰입하며 빠져든 경험이었다. 그러니 꼼짝 않고 두 세 시간을 앉아있어야 하는 영화가 ‘진짜로’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영화 보는 건 '대체로' 재미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재미있는 것은 내게 따로 있었다. 내가 진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극장에 가는 것보다 여러 명과 함께 뛰어노는 시간을 더 가져야 했던 것이다.
김정운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가짜 재미’ 에 빠져있다고 개탄한다. 진짜 스스로만이 느낄 수 있는 재미가 아니라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재미에만 빠져있다고 지적한다. 폭탄주, 막장 드라마, 연예인 가십. 이 모두가 우리 삶이 재미없기 때문에 몰두하는 ‘가짜 재미’ 들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재미란 무엇일까. 김정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내 재미를 찾아야 한다. 사소한 재미가 진짜 재미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통쾌함을 주는 영화의 재미는 길어야 두 시간이다. 그러나 사소한 재미는 평생 간다. 진짜 사소하게 잘 즐기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새소리 듣는 것이 재미다. 나랑 이야기 하다가도 새가 울면 ‘잠깐만’하고 귀 기울인다. 그리고는 그 새가 어떤 새인지 설명이 길어진다.
“원래 봄에만 우리나라를 찾는 새인데 거참 희안하네.” 어쩌고 하면서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새 이야기로 한참을 보낸다. 이 친구는 소리만 듣고 50종류의 새를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자기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자신의 지도교수는 150종류의 새를 구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간만 나면 이 친구는 새소리를 들으러 다닌다. 새소리만 들으면 이 친구의 표정은 아주 행복해진다.
그는 말한다. 진짜로 행복해지려거든 ‘사소한’ 재미, 그리고 ‘나의’ 재미를 찾아야 한다고. 진짜 재미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러한 재미를 찾기 위해서는 일단 무언가를 많이 해 보는게 순서다. 해보지 않고서는 그걸 좋아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여러 악기를 배워왔다. 드럼, 기타, 피아노에 이르기까지. 드럼은 재미없고 기타는 좀 재미있고, 피아노는 가장 재미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한편 대학교 2학년 때부터 1년에 100권 이상 씩 책을 읽어왔다. 읽어보니 가장 좋아하는 분야가 심리학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 엘렌 랭어의 <마음의 시계>라는 책이 가장 좋았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 마다 이 책을 읽고, 읽고, 또 읽는다. 정여울이 쓴 <시네필 다이어리>란 책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나에겐 이 두 권의 책이 <해리포터> 시리즈 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물론 <해리포터> 도 읽어보고 나서 하는 소리다. 비로소 나만의 재미를 찾은 것이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는 <몰입Flow>이라는 책을 통해 ‘나를 잊는’ 몰입의 경험이 주는 행복에 대해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잊고 빠져드는 몰입이야 말로 행복의 필수요소이다. 그래서 일까. 우리는 이 몰입의 경험을 느끼기 위해 영화관을 찾고, 경기장을 찾고, 또 공연장을 찾는다. 그곳에서 영화를 보며, 스포츠 경기를 보며, 콘서트를 보며 열광한다.
하지만 이 몰입의 감정이 꼭 어디를 가야만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들은 하루종일 흙을 파고 놀면서도 지루한 줄 모르고, 개미 한 마리 앞에서도 떠날 줄을 모른다. 그러나 10대가 되고 20대가 되고 또 30대가 되면서 우리는 이러한 몰입의 경험을 잊는다. 기껏해야 영화관이나 가서 ‘시간가는 줄 몰랐다’ 라며 영화 관람을 자기 ‘인생의 재미’ 인양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하루 종일 영화관을 전전하며 영화를 본 경험이 없다면 영화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좋아하는 장르, 좋아하는 영화감독, 좋아하는 영화배우, 좋아하는 영화 속 장면을 줄줄 꿸 수 없다면 그건 영화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막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구체적으로 규정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를 잊고 몰입할 수 있는 경험, 내 인생을 보다 행복하게 해주는 재미는, 사람이 다양하듯이 천차만별로 다양할 수밖에 없다. 어떤 이에게는 춤이고, 어떤 이에게는 요리이며, 어떤 이에게는 그림 그리기이다.
김정운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면 재미있는지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알고있는 사람이다. 가장 좋아하는 일은 글쓰기. 오로지 글을 쓰기 위해 혼자 일본에 기거하기도 했다. 호텔에서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너무 좋아서 집을 호텔에서와 같이 은은한 조명과 하얀 시트로 꾸미기도 했다. 만년필의 촉감이 너무 좋아서 60개가 넘는 만년필을 모으는 수집가이기도 하다. 그의 행복은 베스트셀러 작가나 교수라는 직함에서 나오는 것이 이렇듯 바로 ‘자신만의 재미’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데서 비롯된다.
행복해지고 싶은가. ‘자기만의’ 재미, ‘사소한’ 재미를 찾자. 만약 아직 인생의 진짜 재미를 찾지 못했다면, 뭘 해야 재미있는지 모르겠다면, 당장이라도 박차고 나가서 무엇인가를 시도해보아야 한다. 그림도 그려보고, 악기도 배워보고, 연기도 해보고, 운동도 해봐야 한다. 해봐야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서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해줄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재미는 결코 나의 재미가 될 수 없다. 나의 재미는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나의 재미는 나의 이야기 속에 있다.
김정운은 골프를 좋아한다. 중년남성의 흔한 취미 중 하나가 골프인지라 딱히 특이할 것은 없다. 그런데 그가 골프를 좋아하는 이유가 재미있다. 중년남성이 골프를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해 놓은 것이 재미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건강이나 비즈니스 차원이 아니란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골프는 운동이 아니다. 이야기다. 한국 남자들이 술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네 시간 이상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는 골프밖에 없다. 매번 비슷한 골프 이야기 같다. 하지만 조금씩 다른 이야기가 끝없이 재생산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골프가 재미있는 것이다. 아니, 살면서 지금까지 내 이야기를 이토록 많이, 흥미진진하게 한 적이 있었던가?
맞다. 이야기. 결국 이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수다를 떨 때 가장 흥분하는 주제가 무엇이던가. 결국 자기 이야기 아니던가. 남자들은 정치에 소리를 높이고, 여자들은 연예인 이야기를 주로 하지만 그래도 역시나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내 이야기 아니던가.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 이야기, 나를 괴롭히는 직장상사 이야기, 여행가서 겪었던 소소한 에피소드까지. 자기만의 이야기를 할 때만큼 신나는 순간은 없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나의 이야기’ 가 부족하다. 재미없게 살기 때문이다. 매번 학교와 집을 오가는 사람에게, 매일 직장과 술자리를 오고가는 사람에게,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했던 경험만을 반복 하는 사람에게 ‘자기만의 이야기’ 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괜히 뉴스에서 본 이야기들을 떠들어대고 남의 이야기를 한다. 했던 이야기를 반복한다.
인생을 재미있게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는 입만 열면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느라 바쁘다. 자기가 본 것, 만난 사람들, 경험한 것들이 너무도 재미있기 때문이다. 나는 퀴즈쇼에 출전했던 경험을 잊지 못한다. 상금을 타서라거나, 뭔가 대단한 성과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때의 경험이 색다르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만 만나면 그 때 이야기를 한다. 어떤 사람은 배꼽이 빠지는 결혼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봉사활동 경험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만큼, 그 사람의 삶이 풍성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정운은 강연 때마다 베를린에서 유학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빼먹지 않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순간, 야간 경비원으로 일 했던 경험은 역사적 순간으로 변모하고 백수시절에 한남대교 아래서 낚시만 하던 이야기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45살까지 인생이 꼬여가지고, 거지같이 살았다’ 라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그가, ‘힘들어도 나중에 잘 될거에요’ 라고 말하는 사람에 비해 훨씬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김정운의 삶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만이 겪었던 이야기. 그 이야기가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기본 토대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재미는 내 이야기가 있을 때 생긴다. 건강한 사회는 각자의 ‘내 이야기’ 가 풍부한 사회다.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그리고 또 재미있게 사는 방법은 자기 삶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일도 해보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일에 도전도 해 봐야한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문명이란 항구가 아니라 항해다’ 라고 말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변화를 거부하고 안주하면 편안할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감동도 재미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유. 결국 행복해지려는 거다. 그러니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삶은 결국 과정이고, 과정은 곧 이야깃거리니까. 2012년 겨울. 멘탈 붕괴에서 허우적대던 나와 친구를 구원했던 것도 결국 ‘한 해 동안 있었던 우리 삶의 이야기’ 였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 작년과 똑같은 올해는 재미도없고, 재미가 없으니 행복하지도 않다. 변화하여 삶의 재미를 되찾자. 내 이야기가 풍부해지면 삶도 그만큼 꼭 풍요로워 질 것이니까. 김정운의 말대로, '지금 당장 행복한 사람이 나중에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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