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입니다.
살다보면 면접을 봐야할 때가 있고, 또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제 친구 김모양은 코끼리같은 분노를 방사하며 이런 말을 내뱉곤 했습니다. "야 솔직히 니가 골라가는거지, 그 회사들이 너를 이래라 저래라 한다는 건 정말 웃긴 일이야. 니가 뭐가 모자란다고! 진짜, 눈깔들이 썩었어!" 이쯤되면 제 아무리 '난 짱이야' '난 최고지' 하며 나르시즘을 풍부히 지니고 있는 저라지만, 조금 민망해지고야 맙니다. 그러나 김모양은 폭풍분노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친거 아니야? 너한테 그런 말을 했어, 걔들이?"
이번 주에 서점에 들렸다가 강신주 박사님의 <감정수업>을 읽었습니다. 처음으로 펼쳤던 부분이 '과대평가' 에 관한 부분인데, 거기 이런 말이 나오더군요.
'사람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이 꼭 좋은 일일까. 사랑의 가장 강렬한 징후는 그 사람에 대한 '과대평가' 다. 누군가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면, 이미 그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이 부분을 읽는데, 문득 친구의 분노들이 스쳐가면서, 저를 향한 '과대평가' 가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그건 나를 위로하려는 말뿐일수도 있었지만, 그 친구가 저에게 가진 애정에서 나오는 진심이기도 했을테니까요.
제가 무척 좋아하는 드라마 <메리대구공방전>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 강대구와 황메리는 철천지 원수 지간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의 꿈을 비웃으며 "재능이나 있수?" 하고 조롱하기에 바쁘지요. 그러나 인생사 묘~한지라 둘은 곧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 내뱉는 말도 180도 달라지지요. 여전히 오디션에 낙방하며 외로운 사투를 벌이는 메리. 그런 메리를 보며 대구는 이렇게 낙서를 끄적입니다. '메리는 왜 오디션에 떨어진걸까. 심사위원의 질투다!' 그리고 이 낙서를 본 메리는 대구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재능이나 있수?" 에서 '심사위원의 질투다!' 까지. 그 사이에는 사랑을 통한 '과대평가'가 자리잡아 버린 것입니다.
메리는 왜 오디션에 떨어졌을까.
심사위원의 질투다. 힘내 메리.
과대평가. 우리는 누군가에게 과대평가를 받고, 또 누군가를 과대평가하면서 삽니다. 그리고 그 과대평가야 말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과대평가의 장막이 걷히는 순간, 우리의 삶은 아마도 잿빛으로 변해버릴 테니까요. 자라나는 꿈나무도 아니건만 저희 엄마는 여전히 저를 '희망이' 라고 부르십니다. 제 친구는 '내가 아는 사람중에 니가 제일 멋진 인간이다' 라며 저를 띄워주지요. 외할머니 눈에는 제가 아무리 추리닝 바람에 목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있어도 '우리 공주' 입니다. 객관적으로 산다는 거, 그게 과연 좋은 일일까요. 저도 압니다. 제가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는 거. 그래도 저는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껏 좋아하면서 그 사람이 마냥 위대해보였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리 잘난 사람이 아니라는건 알지만, 여전히 내 친구가 나를 위해서 분노해주고 절대적인 내편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면서, 그렇게 또 사랑받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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