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어떤 이름은 그 자체로 강력한 유대감을 낳는다. 대학교 3학년때였나, 스터디를 통해 알게 된 선배와 지하철을 같이 탄 적이 있었다. '알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기간은 무척이나 짧은 것이었고, 그래서 내심 서로 어색한 기운을 감출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로서는, 어찌됐든 선배가 아닌가.
그러나, 어색할거라는 예상은 기우에 불과했다. 우리는 의외로 쉴 새 없이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선배가 달변이라거나 내가 수다쟁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하나, 선배의 입에서 튀어나온 '윤성희' 라는 이름 석 자 때문이었다. '어? 윤성희를 아세요? 저도 그 작가 작품 좋아하는데.' 마침, 나로서는 윤성희의 단편집을 읽은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라 그 반가움은 더했다. 그렇게 우리는 친해졌다. 윤성희라는 이름은 분명 이외수라든가 공지영이라든가 하는 이름과는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그 이름을 내뱉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알아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선배를 만나기 전까진, 국문과에 다니는 내 친구를 제외하고는, 윤성희라는 이름을 알아봐주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다들 박민규나, 은희경이나, 정이현같은 이름에는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윤성희라는 이름에는 아무런 반응도 얻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박민규나, 은희경이나, 정이현처럼 대중적으로 유명한 작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분명 박민규나, 은희경이나, 정이현보다는 더 좋은 작가였으므로, 그 선배에게서 나온 윤성희라는 이름이 무척이나 놀랍게 느껴졌다.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선배의 입에서 툭 하고 흘러나온, 내가 좋아하는 그 이름이.
오늘 윤성희의 단편 <그 남자의 책 198쪽>을 다시 읽으며, 그 선배와의 일화가 문득 떠올랐다. 내가 스터디를 그만두는 바람에, 오래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아직도 윤성희를 읽을때면 그 선배와 즐거웠던 수다가 마음속에 피어오르곤 한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는 법이다.
'지나갔지요.' 198쪽은 그런 문장으로 시작했다. 무엇이 지나갔는지 궁금했지만 그녀는 앞장을 넘겨보지 않았다. 대신 지나갔지요, 로 끝나는 문장을 생각해내기 시작햇다. 일 주일이면 서너 번씩 와서 책을 읽는 갈색 뿔테 안경을 쓴 할아버지를 보면서 그녀는 이런 문장을 생각했다. 내 나이, 칠십. 이젠 어려운 고비는 다 지나갔지요. 그 옆에 앉아 있는 눈썹이 짙은 중년 아주머니를 보면서는 이런 문장을 떠올렸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내 청춘이 다 지나갔지요. 그녀가 보고 싶을 때마다 그녀가 사는 집 앞을 지나갔지요. 구석에 앉아서 판타지 소설을 읽고 있는 고등학생에겐 나름대로 어울리는 문장인 듯 싶었다.
그녀는 책을 읽는 사람들의 표정을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책을 읽는 사람,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옅은 미소를 짓는 사람, 한 시간째 잠을 자고 있는 사람 그리고 서가를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을 그녀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가 다섯시를 알릴 때까지.
오늘 하루는 이렇게 지나갔지요.
그녀는 퇴실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아르바이트 학생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받아쳤다. 내일 하루도 이렇게 지나가겠지요. 모레도 이렇게 지나갈 수 있겠지요. 그녀가 반납대에 쌓여 있는 책들을 서가에 꽂으면서 말했다. 서가 저쪽 편에 있는 아르바이트 학생이 큰 소리로 대꾸했다.
평생 이렇게 지나가버려라!
책을 꽂다 말고 그녀가 웃었다. 아르바이트 학생도 따라 웃었다. 웃다가, 그녀는 경쾌한 자신의 웃음소리가 너무 어색해서 주춤했다. 내 웃음소리가 이랬나? 잠시 이런 생각을 한 다음, 허리를 움켜잡고 더 큰소리로 웃었다.
- 윤성희 <그 남자의 책 198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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