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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갑추구실/멘탈갑 : 어록

공지영, 안티는 기생에 불과하다

by 김핸디 2013. 9. 14.



제가 앞으로 아마도, 결코 안 할 것이 안티예요. 안티. 안티는 절대로 옳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가진 옳은 부분을 이야기하면 돼요. 안티는 결국 기생하는 거거든요. 항상 논리는 저쪽에서 창조하고, 이쪽에서는 반대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 것은 앞으로도 안 할 거예요. 쉽게 말해서 전쟁 반대는 하지 말고, 평화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거죠. 그중의 하나가 전쟁도 막는 것이겠지만 전쟁 반대 자체가 모토가 되지는 않게 해야 하는 거죠. 그것이 평화는 아니니까요.


- 공지영






소장입니다.


지난 여름, 단연코 화제의 중심이었던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저는 그 영화를 보고 '안티의 무상함' 에 대해 새삼스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체제가 마음에 들지않고, 그것에 불만이 있어서 평생을 걸고 싸워봤건만... 결국 그 싸움까지도 내가 대적하는 대상이 계획하고 만들어낸것이라는 뼈아픈 현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러나오는 무력감! 비단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요. 무엇에 반대하는것 만으로는 결코 내 삶에 희망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부조리한 체제의 항거하는것이 아니라, 이전에 없었던 삶의 양식을 새로이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아프지만 진리지요. 


<설국열차>는 결국 희망의 영화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이라는 것은 기존의 체제를 전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사람을 구원하려고 했던 그 모든 노력들이, 결국은 인류를 또 하나의 거대한 지옥으로 인도했던 역사를... 봉준호 감독은 말하고 싶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이 좀 거창하게 나갔지만... 결론은 그렇습니다. 무언가에 반대해서는 것으로는, 결코 그 무엇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심리학에서는 프레임이라는 용어가 있지요. 맥도날드가 옛날 옛날에 지렁이 햄버거 루머에 휩싸였던 적이 있습니다. 어이없는 루머에, 회사측은 결코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급감한 매출은 수렁에서 벗어날 줄을 몰랐죠. 오히려 맥도날드가 '우리 햄버거는 지렁이 햄버거가 아닙니다' 라고 말하면서, 지렁이에 대한 프레임을 공고히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지요. 예전에 영화감독 김지운씨의 책을 읽었는데, 그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모차르트가 살리에르보다 위대한 이유는 하나다. 모차르트는 살리에르에 대해 무관심했다.' 살리에르는 평생 모차르트를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아마 그는 안티 모차르트 중에 하나였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안티를 한다고 한들, '모차르트' 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안티는 기껏해야 그 대상에 존재하는 기생이기 때문이지요. 만약에,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처럼 타인에게는 무관심한채 자신의 인생을 살았으면 어땠을까요. 분명 더 행복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모차르트보다 더 위대한 음악을 할 수 있었을런지도 모르죠.


살다보면 '안티'의 유혹에 빠지기가 참 쉽습니다. 특히 저처럼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더욱 그렇죠. 그러나 반대는 결국 그 사람의 위상을 더 공고히 해 줄 뿐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과 그 사람의 발언에 분노하며 길길이 날뛰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고 또 아름답죠. 예전에 어떤 책을 읽었는데, 저자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미친놈들이 국제중을 하든, 강바닥을 파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물론 의사를 표명하는것은 중요해요. 그러나 거기에 골몰해서는 안돼요. 인생이 너무 아깝잖아요. "


싫어하는 것, 싫어하는 사람, 싫어하는 삶의 모든 양식에 반대편에 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삶의 양식을 따라 살아가면 됩니다. 빛과 어둠이 양립하는 것이 아니라, 빛의 부재가 어둠일 뿐입니다. 진보와 보수도 마찬가지겠죠. 진보하지 않으면 머무르는 것일 뿐이니까요. 부디, 기생하는 삶을 경계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좌표를 스스로 찍는삶을 살아야지, 그저 누군가의 좌표를 따라산다면 그것은 진정한 '나의 삶' 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