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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갑추구실/좋은생각 : 강연 및 인터뷰

[경향신문] 강신주, 형식과 사랑 사이에서

by 김핸디 2013. 1. 13.


[강신주의 비상경보기]


장례식장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짓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 상조회사 직원이나 아니면 부의금을 대신 전달하려고 온 사람일 것이다. 왜냐고? 고인과 일면식도 없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다. 돌아보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고인이나 유족과 그저 아는 정도의 관계라면, 우리는 그 사실을 애써 숨기기 위해 더 공손하게 향을 지피고 더 애절하게 국화를 고르곤 한다. 이래서 예절이나 법도가 요긴한 법이다. 자신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도 상황에 맞는 연기를 가능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대해 형식이나 방법에 얽매일수록, 우리는 스스로 그를 사랑할 수 없음을 토로하고 있는 셈이다. 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이 자장면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제사상에 어떤 음식을 올려놓을 것인가. 자장면일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제사 법도에 어긋난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쨌든 제 아버님이 좋아하시던 음식은 자장면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아버지가 생전에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홍동백서(紅東白西)라는 규칙에 따라 지금까지 지내온 방식대로 제사상을 차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직감하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고 하는 것이고, 그것을 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고? 그에게 행복을 선사하기 위해서고,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제사상에 아버지가 좋아하던 자장면을 올려놓을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제사상에 홍동백서의 규칙에 따른 음식을 올려놓을 것인가? 여기서 진보와 보수가 갈라진다. 진보적인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통용되는 규칙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해주려는 사랑이다. 그러니 과거의 규칙은 부정되고, 새로운 규칙이 등장할 수 있다. 홍동백서로 장식되어야 할 제사상에 자장면이 올라갈 수 있다는 파격! 그렇지만 이것은 과거의 규칙에 싫증이 났거나 혹은 단순한 변덕으로 생긴 것은 아니다. 누가 뭐라고 흉을 보더라도, 아버지의 제사상에 자장면을 올려놓는 혁명을 감행한 것은 아버지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기원을 따지고 보면, 홍동백서라는 규칙도 아버지에 대한 누군가의 절절한 사랑이 없었다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를 사랑했던 그는 제삿날 아버지가 좋아했던 음식을 올려놓고 싶었던 것이다.

반면 보수적인 사람은 아버지를 사랑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그는 아버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그것을 해주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식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리만을 아버지와 무관하게 실천할 뿐이다. 그러니 제사상마저도 과거의 방식이나 형식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생전에 자장면을 좋아했다는 것을 모르니, 홍동백서로 차려진 제사상을 선택할 수밖에. 결국 타인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꼴이다. 이것은 결국 자기 사랑 아닌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칭찬을 듣기 위해, 혹은 불효자라는 오명을 쓰지 않기 위해, 그는 열심히 아버지가 원하지도 않던 음식을 차려 놓고 생색을 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귀신이 정말로 있다면 아버지의 혼령은 자식의 집에 제사 음식을 먹으러 오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혼령은 집 근처 중화루라는 중국음식점으로 가지 않을까.

일러스트 | 김상민

▲ "진정한 사랑의 표현은 상대방이 원하는 걸 주는 것
형식논리 얽매인 진보, 소외된 이웃의 절망 헤아려야"


타인이 원하는 것을 읽어내 그에게 그것을 해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기존의 형식과 방법을 타인에게 관철할 것인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 전자의 길, 즉 사랑의 길을 따를 것이다. 사랑 때문이다. 홍동백서를 포기하고 자장면을 제사상에 올리는 혁명의 정당성은 오직 사랑 때문이다. 최소한의 인문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시라도 보수의 편에 설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떻게 인간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맹목적으로 통용되는 형식과 방법을 따를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성복 시인의 예리한 통찰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 라는 산문집에서 시인은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의 방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타인을 사랑하게 되면 그를 가장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아니 정확히 찾지는 못할지라도 찾으려는 노력을 쉬지 않을 것이다. 반면 이렇게 해야만 사랑일 수 있다는 방법을 미리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타인의 속내를 읽으려는 노력 자체를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어지는 순서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법을 타인에게 폭력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장 큰 폭력인 셈이다. 내 앞에 있는 타인보다는 자기가 옳다고 맹신하는 방법만을 염두에 두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방법을 가진 사랑은 이기적인 자기 사랑으로 귀결하게 된다. 아니 오직 자신만을 사랑한다는 추악한 모습을 가리려고 사랑의 방법을 맹신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마치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과 무관하게 제사상을 차리는 자식처럼 말이다.

정치가든 학자든 아니면 일반 시민이든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이라면 타인에 대한 사랑만이 새로운 방법을 발명해낼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이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니 진보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면 할수록, 타인을 사랑하기는 더 힘들 테니까. 현재 진행형인 진보정치의 위기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지금 진보정당은 억압받는 이웃들보다 자신의 이념을, 자신의 방법을, 그리고 자신의 동지를 더 사랑하고 있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고나 할까. 진보정당이 보수정당보다 더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어떻게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진보정당은 자신의 신념, 방법, 그리고 동지마저도 모두 내려놓고 사랑이란 잣대로 자신의 삶을 처절하게 반성할 때 아닌가? 이 대목에서 시인 황지우의 통찰은 조금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뼈아픈 후회' 중에서

< 강신주 | 철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