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 청소년인문학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99809.html)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지문적성검사의 허와 실’을 다룬 프로그램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지문으로 적성검사를 하다니. 우리들 손바닥의 그 미세한 주름들이 재능의 바로미터란 말인가. 지금이라도 지문적성검사를 하면 도통 어디 숨어서 여태 안 나오는지 알 수 없는 재능과 적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지만 왠지 그런 상상 자체가 부끄러워졌다.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결론이 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순간 가장 사랑하는 일, 내가 지금 이 순간 가장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 내 재능이고 내 적성이라고. 조금 더 마음속 깊숙이 들어가보면, 내 마음은 이렇게 속삭인다. 나의 재능이라 믿는 것, 나의 적성이라 믿는 것, 그런 것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 전혀 우쭐할 필요도 주눅들 필요도 없다. 우리가 어떤 일에 푹 빠져 있을 때, 무언가 똑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이 우리의 지친 어깨를 다독이고 있다. 옛사람들은 그것을 ‘뮤즈’라고도 불렀고, ‘지니어스’(genius)라고도 불렀다.
흔히들 천재는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라 생각하지만, 지니어스는 원래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스시대에는 재능과 창의성이 인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서 분리된 창조성의 혼, 지니어스 요정의 힘이라 믿었다. 예술가의 스튜디오 벽 안에서 숨어사는 마술적이고 신성한 혼의 이름, 그것이 지니어스였다. 예술가가 작업에 몰두해 있을 때 벽에서 몰래 나와 우렁각시처럼 감쪽같이 예술가를 도와준 후 흔적 없이 사라지는 마술적인 정령, 그것이 지니어스였던 것이다.
위대한 재능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생각했던 이 지혜로운 믿음이 과도한 자아도취로부터 예술가들을 보호해주었다.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 나와도 ‘지니어스 탓’이고, 아무리 형편없는 작품이 나와도 ‘지니어스 탓’이니, 예술가들은 자아도취에도 자기혐오에도 빠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천재적인 재능이 하늘의 뜻이 아니라 개인의 소유물이 된 것은 ‘모든 건 인간 탓’이라 믿게 된 르네상스 이후의 일이라고 한다. 개인을 우주의 중심에 놓게 된 이후 인간은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 셈이다.
재능을 일종의 사유재산으로 취급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도 ‘나는 왜 재능이 없을까’라는 번민에 시달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빨리 재능을 발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각종 학원으로 아이들을 출근시킨다. 조기교육, 조기유학, 조기졸업……. 모든 것을 ‘조기’에 해결하려고 하는 이 재능의 속성재배 시대. 사람들은 지니어스 요정의 축복을 느긋하게 기다리기보다는 지니어스를 내면화해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재능은 마치 한정된 자원처럼 취급되고, 창작은 재능을 소모하는 고통이 되어버린다. 오죽하면 위대한 작가 노먼 메일러조차도 “내가 쓴 책은 모두 조금씩 나를 살해했다”고 고백했을까. 재능을 개인의 소유물로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더욱 외로워지고, 더욱 고통스러워진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 아역스타로 전세계를 주름잡던 배우들이 성인이 되면 엄청난 스트레스와 슬럼프에 시달리고, 스포츠 스타로 각광받던 선수들이 선수 생활이 끝나면 ‘삶의 기술’을 몰라 고통받는 일이 많다. 이것은 재능을 개발하느라 삶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능을 위해 삶을 ‘올인’한다는 것은 위험한 상상력이다.
고대 그리스어에 ‘파르마콘’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도움이 되는 것이자 동시에 방해가 되는 것’, ‘치료이자 독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인간이 문자기록에 의지하면서 점점 기억력이 쇠퇴하고, 휴대폰을 사용하면서 번호를 외우는 능력이 저하된 것처럼 말이다. 재능의 달콤한 축복뿐 아니라 재능의 치명적인 독성도 가르쳐주는 것이 어른들의 역할 아닐까. 재능을 개발한답시고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빼앗지 않는 것이 부모의 지혜 아닐까. 재능은 ‘사람’을 빛나게 해주지만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데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마이클 잭슨은 인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노래와 춤의 달인이었지만, 그렇게도 되찾고 싶었던 ‘행복한 어린 시절’을 이 세상 어디서도 돌려받지 못해 평생 고통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인생 한 방’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재능=직업=인생’이라는 위험한 도식이 자리잡고 있다. 재능은 물론 중요하지만 모두가 재능에 안성맞춤인 직업을 가질 수 없다. 직업은 물론 중요하지만 직업이라는 테마로 인생의 거대한 벽화를 모두 채울 수 는 없다. 재능은 삶의 토양의 ‘비료’는 될 수 있어도 ‘흙’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어떤 효과 빠른 재능의 비료도 사랑이라는 물과 우정이라는 태양 없이는 삶이라는 나무를 키우지 못한다. 재능은 소중한 삶의 자산이다. 하지만 재능은 열정을 이기지 못하고 열정은 진심을 이기지 못한다. 우리의 삶은 재능보다 크고 성공보다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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