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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갑추구실/좋은생각 : 강연 및 인터뷰

[한겨레, 정여울의 청소년인문학] 너는, 나다.

by 김핸디 2012. 6. 24.

 

너와 나의 삶, 몸 사리지 말고 ‘국민총소통’

한겨레 | 입력 2012.04.20 20:20
 
영화를 보다가 문득, 어떤 문장이 화살처럼 아프게 귀에 꽂힐 때가 있다. "None of your business"라는 표현이 그렇다. '상관 마', '참견 마'로 해석되는 이 표현은 '참견해도 될 일'과 '참견해선 안 될 일'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너나 잘해', '남이사', '돌아서면 남' 같은 말들은 타인의 삶에 따스한 눈길을 던졌던 우리의 관심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렇게 너와 나의 관계 맺기를 차단하는 말들 때문에 삭막한 세상은 더욱 팍팍해지는 것 아닐까.
 
 
반면 내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는 표현도 있다. 예컨대 "Don't be a stranger" 같은 문장은, 이별의 표현이지만 이별의 한기를 단숨에 녹여주는 따스함이 있다. '연락하고 지내자', '안면 트고 살자' 정도로 해석되는 이 말은, 가끔 신비롭고 유혹적이기까지 하다. 친구가 이사 가거나 전학 갈 때, 동료가 전근할 때, 자칫 연락이 끊기기 쉬운 상황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해준다면 마음이 얼마나 따뜻해질까. "Don't be a stranger"라는 문장은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낯선 이방인이 되지 말자는 달콤한 속삭임 같다. 몰라도 되는 사람, 연락 안 해도 아쉽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한 번 맺은 인연을 쉽게 풀지 말자는 굳은 다짐처럼 들리는 것이다.


 

 
 
 
'내 성적, 내 월급, 내 스펙을 잘 챙겨라'고 가르치는 어른들은 많지만, '남의 꿈, 남의 희망, 남의 사랑을 돌볼 필요가 있다'고 가르치는 어른들은 점점 줄어든다. 그런데 인간의 두뇌는 남을 생각해야 나를 더 잘 알게 되도록 만들어졌다. 내 꿈, 내 희망, 내 사랑도 본래 남들의 것을 엿보며 자란 생각의 나무들이다. 책만 보거나 마우스만 클릭할 것이 아니라 신발을 신고 문밖으로 나가 직접 발로 뛰며 굴러야만 알 수 있는 생의 진실이 있다. 그러니 몸 사리지 말고 타인의 삶에 개입하라고, 세상의 고통 속으로 뛰어들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어른들이 필요하다. 국민총생산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국민총소통'이 아닐까.
 

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I-Thou(나-너)'를 마치 합성어처럼 사용했다. 나와 너라는 별개의 단어가 마치 처음부터 한 단어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마르틴 부버. 그의 어법은 모든 것을 내 것과 네 것으로 구분하는 현대인의 꽉 막힌 사유의 장벽을 자연스럽게 허물어버린다. 당신의 고통 속으로 뛰어들어도 될까요. 내 아픔 속으로 얼마든지 들어오세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아니, 우린 그래야만 합니다. 남의 일에 뛰어들어야만 겨우 알아지는 세상이 있지요. 남이 내 일에 감과 배를 놓아주어야만 깨닫게 되는 진실이 있지요. 마르틴 부버는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그는 나의 의미가 오직 너를 통해서만 발현될 수 있음을 힘주어 강조한다. "온 존재를 기울여 너를 향하여 나아갈 때 참된 나는 살아서 움직이고 현재를 사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 '너-나'의 분리불가능성을 남보다 일찍 깨달은 것 같다. "인간의 본성이란 자신과 동시대 사람들의 완성을 위해, 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일할 때에만 자기의 완성을 달성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마르크스가 열일곱 살 때 남긴 문장이다. 그는 사적 행복과 공적 행복 사이에 단지 희미한 교집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행복'과 '자아의 완성'이 완전히 일치할 때 비로소 진정한 개인의 행복도 찾아올 수 있다고 믿었다. 개인의 행복과 집단의 행복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떤 행복도 완전할 수 없음을, 전 생애를 통해 증명하는 것이 그의 글쓰기였다. "지금까지 철학은 세계를 해석해왔다.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메시지에 담긴 사유의 마그마. 그것은 바로 '네 일이나 잘해'라고 윽박지르는 세상을 향해 '당신의 일이 바로 내 일이다, 모든 것이 우리 일이다'라고 맞받아치는 당당함이 아니었을까.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글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마르크스의 책 아무 곳이나 펼쳐 닥치는 대로 읽었다고 한다. 그가 마르크스를 사랑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마르크스를 읽으면 머리가 좋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마르크스가 매번 섬뜩한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내가 자꾸만 잃어가고 있는 어떤 아련한 빛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그 빛은 '나'라고 불리는 익숙한 것들과 '너'라고 불리는 낯선 것들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열정이다. 물론 타인을 돕는 일은 위험하다. 누군가 나의 아픔 속으로 성큼 걸어들어오는 것도 위험하다. 그러나 우린 알고 있다. 위험이 있는 곳에 비로소 구원이 있음을. "다만 연결하라"고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는 말했다. 무엇을 연결할까. 나와 당신을, 우리와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과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연결해보면 어떨까. 세상은 무섭다. 하지만 이 무서운 세상을 아무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훨씬 무서운 일이 아닐까.

 
정여울 문학평론가